정묘호란과 병자호란 그리고 강화도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그리고 강화도
  • 최보길
  • 승인 2013.01.11 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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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보길의 발로 새긴 강화역사 이야기 ⑥] 충렬사(1)
강화는 왕(王)과 관련이 깊다. 고려 때 몽골의 침략을 피해 도읍을 옮긴 것도 그렇고, 조선의 임해군, 영창대군, 철종 등처럼 왕위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왕족을 견제하거나 고려말 우왕과 창왕, 조선의 연산군과 광해군처럼 반정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난 왕의 유배지로 활용된 것도 그렇다. 
 
거기에 몽골의 침략을 피해 도읍을 옮긴 고려정부와 후금(훗날 청)의 침입으로  위기를 맞았을 때 왕의 피난처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강화도는 개성과 한양에 가깝고 전국에서 모인 세곡이 지나가는 한강하구의 요충지였으며, 외적을 적은 방어력으로 효율적으로 막을 수 있는 천혜의 요세였다. 
 
임진년 왜란이 일어났을 때 선조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의주로 피난을 갔다. 전쟁결과가 좋지 않을 경우 국경을 넘어 명으로 피난을 가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되면 국내에서 왕을 대신해서 전쟁을 지휘하고 국내정치를 담당할 기관이 필요한데, 이때 설치된 것이 분조이다. 의주에 머물고 있는 선조를 원조, 광해군을 중심으로 하는 또하나의 정치구조로 분조를 설치하였다. 왜란을 거치면서 발생한 원조, 분조의 정치구조는 호란을 겪으면서 다시한번 발생하는데 이때 인조를 중심으로 하는 원조는 강화도로, 세자를 중심으로하는 분조는 전주로 각각 이동하였다. 외세의 침략이 북에서 남으로 이루어진 터라 인조는 의주로 향하지 않고 유목민 중심의 기병 전술에 익숙한 후금에 대비해 강화도로 조정을 옮긴 것이다.
 
후금은 강화에까지 병력을 출동하지 않았다. 후금의 최종목표는 명이었다. 그리고 명으로 가는 길목에서 획득한 요양과 심양을 회복하기 위해 출동한 명나라 장수 모문룡을 제압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모문룡은 후금과의 전투에 밀려 조선으로 들어왔다. 모문룡은 후금과 조선에 큰 근심거리였다. 배후의 위협조건인 조선과 화의하고 모문룡과의 전투에 전념할 수 있다면 위험을 각오하고 조선 전역에 후금의 군대를 보내는 모험을 감행할 의지가 없었다. 이 상황에서 인조는 강화도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안전을 전제로 후금과의 협상을 진행할 수 있었다. 후금과의 강화조약은 강화도 연미정에서 체결되었다.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고친 1636년 다시 조선을 침략했다(병자호란). 이때의 청은 정묘호란 때와는 달랐다. 청의 최대 약점이었던 수군(해군)과 성을 중심으로 전투를 벌이는 특성을 넘어설 수 있는 포병전술을 갖춘 상태였다. 이러한 청의 자신감은 중원으로의 진출을 더욱 자극하게 되었고, 자칫 중원으로 군사력을 돌렸을 때 또 다른 배후의 적이 될 수 있는 조선에 대해서는 확실한 견제가 필요했다. 그것은 정묘호란 때의 형제 관계를 넘어서는 군신관계를 관철시키는 것이었다. 
 
반면 정묘호란부터 병자호란이 일어날 때까지의 10년은 조선에게 철저한 개혁과 대비를 요구했으나 조선의 정치를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시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인조는 정묘호란 때의 경험처럼 다시 강화로 피난하려 하였다. 그러나 정묘호란 때 인조의 강화행을 막지못해 협상의 주도권을 잡을 수 없었던 청은 제일 먼저 강화로 가는 길목을 차단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다. 들판의 곡식을 불태우고 산으로 들어가 장기전을 펼치는 조선의 전술을 무시하고 속도를 내어 한양에서 강화로 이르는 길목으로 향했다. 
 
인조의 강화행이 좌절되었고, 수병과 홍이포를 중심으로한 포병전술을 갖춘 청은 강화성을 함락시켰다. 강화도로 들어오지 못한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향했고, 홍이포의 위력 앞에 견고한 남한산성도 허물어져갔다. 인조는 끝내 남한산성을 나와 머리를 세 번 조아리며 세 번 절하는 이른바 ‘삼배구고두’의 예를 청태종에게 행했고, 이를 기록한 삼전도비는 아직도 서울 잠실벌에 자리잡고 있다.
 
몽골과 후금의 전투력보다 청의 전투력이 수병과 포술면에서 보완되었기 때문에 전쟁의 승패가 갈린 것이지만 가볍게 보면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 보였던 왕의 강화도 피난 성공여부가 전쟁의 양상을 다르게 만들었다. 전란을 피해 왕이 그랬던 것처럼 서해의 여러 섬으로 들어간 백성들도 많았다. 
 
그러나 그들은 외적의 살육은 피할 수 있었지만 제한된 면적을 가진 섬에서 많은 식량을 구할 수 없었기에 배고픔이라는 또 하나의 위협을 만나게 되었다. 섬으로 가는 사람은 일상의 평온을 갈구했지만 전쟁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한적이긴 하지만 왕에게는 생존을 위한 평온이 가능했다. 그래서인지 왕은 강화도를 생존을 위한 최후의 보루로 정하고 전란 때면 강화를 향했다. 
 
그리고 왕이 강화로 들어올 때면 섬사람들의 삶은 더 괴로워졌다. 생존을 위해 고향을 떠나 섬으로 들어왔던 백성들은 두고 온 모든 것에 대하여 미안함을 가졌다. 그러나 왕은 두고 온 자신의 백성에게 미안함을 느끼지 않았다. 왕에게 백성은 통치의 대상일 뿐 통치의 이유, 목적은 아니었다. 호란 이후 민란, 외세와의 전쟁 때 왕 혹은 왕족이 강화로 온 일은 역사에서 찾을 수 없다. 전투에서의 전술, 무기 체계가 발전 변화되어 강화가 갖는 장점인 요세로서의 기능은 약화되었다. 
 
이는 강화에서 있었던 운요호 사건, 병인양요, 신미양요 등에서 강화의 방어선이 뚫리고 강화에 상륙을 허용한 것에서 증명된다. 이후 왕이 강화로 오지 않았다는 것은 적어도 강화사람들에게는 그만큼의 고통이 줄어들었다는 것임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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