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사람 강화읍 엄영선
강화사람 강화읍 엄영선
  • 황대익 기자
  • 승인 2021.09.15 11:38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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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지역 내에서 오래 살아온 한 개인의 삶을 들으면서 강화 문화예술인 소개의 번외편으로 삼고자 한다.

앞으로 종종 강화에서 사는 사람들의 인터뷰를 통해 그들의 지나온 삶 또는 현재 활동하고 있는 모습을 단편적이나마 조망해 보고 과거의 강화 또는 미래의 강화를 더듬어 볼 기회를 가져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다.

그런 이유로 강화에서 오래 사신 분을 먼저 만나고 싶던 차 엄영선 씨를 소개받았다. 연세가 많으시지만, 기억력이 명료하시니 좋은 인터뷰가 될 것이란 추천과 더불어.

애써 의미부여를 하지 않는 백서의 성격으로 읽히길 바란다.

우선 태어나고 자라신 곳을 여쭙겠습니다.

1931년 읍에서 태어났죠. (한동네에서 살아온 뻔한 까마득한 어린 사람인데도 인터뷰 끝까지 꼬박꼬박 높임말을 쓰셨다.) 지금은 문화재이자 관광지인 용흥궁인 그곳이에요.

당시엔 문화재로 따로 취급하지 않아 선친이 집을 사서 가족이 살고 있었죠. 2006년까지 살다 이사를 하였으니 용흥궁 터에서 75년을 살았었네요. 다른 사람들에겐 용흥궁이지만 제게는 그냥 평생 우리 집이었답니다.

원래의 집인 용흥궁을 떠난 계기는 아마도 문화재이기 때문이겠죠?

, 그렇죠. 집을 개조하거나 하는 등 그동안 손도 못 대고 불편한 부분도 있었기에 용흥궁 바로 옆으로 이사가 집을 짓고 살다가 2006년도 이곳(갑곳리)으로 이사 왔습니다.

그러면 선친께서는 그 전에 어디서 사셨는지요.

송해면에서 엄씨로 12대를 살아왔었어요. 읍으로 이사를 온 거죠. 송해면엔 대대로 물려받은 제 명의의 땅도 아직 남아 있어요.

당시 일제 강점기 시절이었는데 기억나는 점이 있으시다면.

어릴 때라 많은 것이 기억나진 않지만, 학교는 합일국민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때는 거기 시험을 봐서 들어갔어요. 당시 강화국민학교는 일본인 교사들이 있었고 합일국민학교는 한국인 교사들이 있었죠.

수업은 그래도 일제 치하라 할 수 없이 일본말로 배웠지만, 교사들이 한국인이었던 덕분에 태극기도 일찌감치 1.2학년 때부터 알았습니다.

졸업 후에 곧 해방을 맞으셨겠네요.

어수선했죠. 다들 먹고 살기 바빴고. 해방 후 1948년 정부수립 직후 제 형님은 군인이 되셨어요.

형제 이야기도 조금 듣고 싶습니다.

형님이 군인이 된 지 2년 후 집에 잠시 휴가를 나와 있는 도중 6.25가 터졌어요. 그래서 급거 귀대 명령을 받아 다시 가야 했습니다.

당시 월곳리 연미정에 배 타는 곳이 있어 거기에서 서울 마포까지 뱃길이 있어 그렇게 갔습니다. 제가 집에서 배 타는 곳까지 형님을 배웅 나가며 보고 들은 게 있어 기억이 생생하군요.

당시 상황을 뻔히 아는데 간혹 북침설 얘기하는 사람들 보면 어이없고 화가 납니다.

그리고 제 동생은 직업군인으로 살았어요. 베트남에 백마부대원으로 파병 나갔고 나중에 정년으로 퇴직했지만 결국 베트남전에서 얻은 고엽제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픈 역사의 흔적이군요. 삼형제분이 결국 다 국가유공자이시네요. 6·25전쟁 당시 기억을 좀 더 부탁드립니다.

……. 1.4 후퇴 때 인천에서 배를 타고 제주도로 피난을 갔습니다. 그리고 저는 거기서 한 달간 군사훈련을 받고 국군이 됐어요. 초반 한 달간의 교육이 너무 힘들어 견디지 못한 훈련생 중 자살하는 경우도 봤었답니다.

제가 x선 촬영기사로 평생을 보냈습니다. 당시엔 보건전문대학 이런 개념이 없어서 군대에서 배울 수밖에 없었는데, 다행히 제가 국군으로 있으면서 보건위생, 의료전문교육과 뢴트겐(x선 촬영기술) 등을 배웠습니다. 위생병으로 근무했던 셈이죠.

근무 중에 여순반란 사건이 있어 당시 빨치산이었던 남부군을 이끌던 이현상의 시신도 기억납니다. 총알을 4번 맞은 상태더군요. x선 사진을 찍어 보고해 잊지 않아요.

전쟁이 결국 휴전으로 매듭지었는데 이후는 어떻게 보내셨습니까?

제대한 후 1957년도에 강화읍사무소 앞쪽에 서울병원이라고 있었어요. x선 촬영기사가 드문 시절이라 거기서 기사로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1965년도부터는 남궁병원에서 역시 x선 담당을 맡아 1998년 은퇴할 때까지 43년을 근무했습니다.

강화에 다리가 없던 시절(1969년 완공)이라 응급환자가 밤에 배를 타고 갈 수가 없어 수술은 남궁병원에서 많이 했었어요. 위세척도 많이 했고. 먹고 살기 어려워 마음고생 하다 농약 먹고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도 그땐 다소 흔한 일이기도 했거든요.

또 당시 폐결핵도 흔했죠. 보건소가 따로 없어 그 많던 직물공장 직원들이 단체로 병원에서 정기적으로 검사를 맡기도 했어요.

1950년대 이후 부근리엔 양공주(미군 상대로 성매매 하는 이)들이 삼십여 명 상주했는데 이들도 일주일에 두 번 꼬박꼬박 검진을 받아야 하던 시절이었는데 이분들도 정기적으로 검진 받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천하다고 욕할 일이 아니었어요. 어려운 시대에 그렇게 몸 팔아 동생들 학비와 식구들 생활비를 보내줬으니까요.

지금 정식명칭은 남궁내과의원으로 남궁호삼 선생님이 대를 이어 원장을 맡고 계시죠?

제가 갔을 땐 국민학생이었어요. 어릴 적부터 아주 똑똑하고 공부도 잘했는데 결국 의사가 되더라고요.

과거의 강화 모습을 아무거나 이것저것 떠올려주세요. 지금 강화에 사는 사람들이 기억 못 하는 것도 많을 테니까요. 워낙 길이 새로 많이 나고 바뀌어 옛 모습이 사라져가는 건 개인적으로 좀 안타깝습니다. 제가 알던 것이나 모르던 것이나 다 들어보고 싶습니다.

옛날엔 강화읍 내의 번듯한 길이라면 강화국민학교 올라가는 길밖에 없었어요. 가장 중심 길이었죠. 대부분 좁은 골목길들만 있었답니다. 올라가는 길 중간엔 항상 큰 종이 있었고(그 종은 고려 궁터로 옮겨짐).

지금은 다 복원됐지만, 그땐 성곽이 다 헐어져 있고 강화 남문만이 그나마 온전히 모양을 갖추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도 6·25전쟁 중간에 무너졌죠폭격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냥 관리가 안 돼 자연스레 헐린 겁니다. 지금 모습은 나중에 다시 복원한 것이고요.

지금 강화병원 있는 자리는 물론이고 이전엔 갑곳리까지 드문드문 있던 집들 빼고는 다 밭이었는데.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됐군요.

제가 나고 자란 용흥궁을 지금 아리랑 골목이라 하죠.

작은 일반 집이었는데 6.25 후 십여 년 지나 한 과부가 작은 술집을 시작했고 장사가 잘 돼 뒤쪽으로 조금씩 계속 넓혀 나중엔 사람들이 많이 찾게 되고 유명해졌더라고요. 골목 이름도 아리랑 집 식당 이름을 따 아리랑 골목이 된 것이고.

요즘 사람들이 많이 찾는 조양방직이 원래 일제에 지은 강화대표 직물공장이었어요.

1963년엔 작은 창고 같던 공장을 김재소란 사람이 크게 넓혀 본격적으로 강화를 대표하는 심도직물로 커졌었고, 강화에 다리가 놓이면서 동진 직물이 생겨 여기도 전국적인 직물공장으로 커졌죠.

공장들이 많았던 만큼 강화가 인구도 늘고 부자 동네를 만들기도 했지만 나빠진 것도 많아요.

지금은 도로로 덮인 동락천도 60년대까지 애들이 거기서 물놀이하고 물고기도 잡고 했는데 공장들이 들어서면서 온갖 염색물이 넘쳐나고 금방 시궁창 물이 됐으니까요.

이제 조양방직 자리는 카페가 됐고 심도직물 자리는 공원이 됐고 동진직물 자리는 아파트가 됐으니 세월 많이 지났습니다.

읍내의 진고개도 일제 당시엔 꽤 큰 공사였어요. 중장비도 제대로 없던 시절 산을 헐어 길을 내야 했으니까요.

북문 올라가는 길도 지금은 차로 다니지만, 옛날에 처음 길을 낼 때 역시 사람들이 일일이 좁고 험한 산길을 깎아 많은 노력을 들여 낸 것이죠. 포장은 나중에 길을 더 닦고 한참 후에야 이루어진 것이고.

지금 강화대로라 부르는 길도 처음엔 자동차들 지나가기 좋도록 다 사람 손으로 길 닦는 작업을 했는데 공사 중 근처에 있는 잡석들을 주어와 깨 그것으로 자갈 삼아 같이 깔았습니다.

그때는 대행길이라 했어요.(큰 길을 말하는 강화방언인 '행길'''가 합쳐진 말) 아마 이게 60년대 일겁니다. 80년대 초까지도 내가면은 아스팔트가 아닌 흙길이었었어요.

그리고 옛날 강화엔 지금처럼 저수지나 농수로가 많지 않았어요.

특히 교동이나 내가면 망월 같은 그 넓은 벌판에 다 물을 댈 수 없으니 건파로 벼를 재배했죠(검색해 보았더니 원래 명칭은 건경乾耕이고 조선시대 농가에서 벼를 재배할 때 마른논(乾畓)을 만들어 종자를 직파(直播)하던 경종법이라 한다).

요즘은 다 기계로 하지만 그거 손이 아주 많이 가고 번거로운 일인데 강화에서 건파 농사는 당시 흔했어요. 망월리 벌판 하나만으로도 강화사람 3년은 먹고 산다잖아요? 제가 그때도 듣던 말이죠.

더 듣고 싶은 게 많습니다만 마지막으로 가족들에 관해서도 말씀해 주세요.

결혼은 1958년에 했어요. 강화읍 남문 안에 있던 집안인데 소개를 받았죠. 하지만 2019년 그러니까 3년 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60년을 같이 살았습니다.

같이 딸 둘 아들 하나 키웠어요. 큰딸은 안양에 있는 학교에서 교장을 맡고 둘째 딸은 간호사가 직업이죠.

아들은 나처럼 보건의료를 전공해 보건소에서 방사선 촬영을 담당해요. 손주들도 다 똑똑하고 공부 잘하고 있어 마음이 편안합니다.

더 많은 이야기를 들었어도 기사로 간략히 정리하려다 보니 지면에 다 옮기지 못하는 점이 개인적으로 아주 아쉽다. 옛날 시장 이야기 여러 에피소드 더 자세한 질문들을 통해 들은 그동안 알던 좋은 사람 나쁜 사람 이야기…….

섬이라는 특징상 지역 내의 알력도 있고 다양한 견해가 있다. 그래도 같은 지역 내에서 같이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오래 같이 살아온 분이 이렇게라도 기억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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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2021-09-16 07:34:17
황대익기자는 한마디 하면 발끈 해요. 그래도 한마디 하죠 뭐. 이번 글은 <백서>라기보다는 <설문> <앙케이드>죠. 그래도 이런 분 이야기가 훨씬 재미있죠. 중량감도 없는 문화예술인보다 낫죠. 과거의 강화를 들을 수 있으니까요. 한데, 이번 글 역시 부족한 점이 있어요. 일종의 서민 인생사, 서민 생활사, 그런소재를 그저 수박 겉핥기로 썼음..... 설문 대상자에 대한 진지한 탐구가 부족, 따라서 예의가 부족함. <지면에 다 옮기지 못하는 점>을 썼어야 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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