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 이름, 그게 뭐라고... 나라 뺏기는 것도 몰랐네
임금 이름, 그게 뭐라고... 나라 뺏기는 것도 몰랐네
  • 이승숙 작가(양도면 조산리)
  • 승인 2021.08.30 13:2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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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화도조약과 연무당

서울 용산구 후암동을 떠올리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넉넉합니다. 아이들이 대학에 다닐 때 살았던 동네여서 정겨운 마음이 들 뿐만 아니라 도서관이 두 개나 집 근처에 있어서 후암동이 더 좋았습니다.

가끔씩 애들 집에 갈 때면 용산도서관을 즐겨 찾았습니다. 강화도서관에서 볼 수 없는 책들을 그곳에서 만날 수도 있어 서가를 뒤지고는 했습니다.

그때 심행일기를 만났습니다. ‘강화도를 주제어로 넣어서 검색을 하다 만난 책이었습니다.

도서관에서 만난 <<심행일기>>

심행일기는 조선과 일본과의 강화도조약을 맺을 때 접견대관이었던 신헌(1810~1884)이 쓴 일기입니다.

강화도조약 체결 당시 접견대관이었던 신헌(申櫶)

신헌은 순조·헌종·철종·고종조에 걸쳐 금위대장, 훈련대장, 진무사 등 중요 무반직을 두루 역임한 무신으로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고 조선의 개항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외교가이기도 합니다.

심행일기에는 1876년 음력 정월 한 달 동안의 나날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보통의 일기처럼 날씨로 시작해서 글쓴이의 건강 상태와 일상 등이 기록되어 있지만 그보다는 강화도조약을 맺을 때의 장면들이 빠짐없이 일기에 들어있습니다.

심행일기
심행일기

강화도조약을 맺기까지의 과정들이 일기에 낱낱이 다 들어있으니, 개인의 일기라기보다는 마치 정부의 공식 기록물 같습니다.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1876227(고종 13년 음력 23) 조선과 일본 제국 사이에 체결된 조약입니다.

근대 국제법의 토대 위에서 맺은 우리나라 최초의 조약이며, 일본의 강압적 위협으로 맺어진 불평등 조약이기도 합니다.

강화도조약을 맺기까지 근 한 달간 일본 측과 밀고 당기는 회담이 있었습니다. 조약은 강화읍 서문 건너편에 있는 연무당(鍊武堂)에서 맺었습니다.

연무당에서 강화도조약을 체결하는 모습

연무당은 조선시대 군사들이 무술 훈련을 받던 곳으로 지금은 터만 남아 있습니다.

1999년 봄에 강화로 이사를 왔을 때, 우리는 강화읍의 서문 근처에 집을 얻고 1년간 살았습니다.

그때 오가며 연무당 옛 터를 봤습니다. 볼 때마다 이상했습니다. 강화도조약을 맺은 곳이 뭐 그렇게 자랑할 곳이라고 저렇게 기념비를 세워 놓았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아픈 역사도 우리의 역사입니다. 다시는 그런 아픔을 겪지 말아야겠다는 결의를 다지기 위해서라도 연무당 옛 터를 보존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픈 역사의 현장, 연무당 옛 터

연무당 옛 터에서 145년 전 그 때를 그려봅니다.

연무당 옛 터

187625일이었습니다. 갑곶진을 통해 일본군이 강화부로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그 전해(1875)에 있었던 운요호 사건에 대한 책임을 물으러 온 일본 대표단이었습니다.

일본 대표단을 응대하기 위해 조정에서는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가 바로 <<심행일기>>를 쓴 판중추부사 신헌입니다. 신헌은 일본 대표단과의 회담을 위한 접견대관으로 추대되어 강화로 왔습니다.

'심행일기(沁行日記)'의 심()은 예로부터 강화도를 이르는 별칭이었으니 심행일기는 '강화 행차의 일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일기는 그가 강화로 떠나기 하루 전인 병자년 정월 오일부터 시작됩니다. 신헌은 이 일기에서 접견단의 행적, 일본 측과의 협상 기록 및 접수한 공문과 보고문, 상소문, 조약 초안 등의 관련자료 일체를 다 수록했습니다.

따라서 '심행일기'야말로 조선의 관점에서 강화도 조약의 체결 과정을 이해할 수 있는 최고의 사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심행일기에는 참 흥미로운 점이 있었습니다. 일본과 밀고 당기며 첨예하게 대립했던 비준 양식에 대한 부분입니다.

조선은 일본이 제시한 12개의 조문에 숨어있는 뜻을 파악하기보다는 수호조규를 비준할 때 어명이 있는 어보(御名之御寶)를 찍는 문제에 대해서만 골몰했습니다.

즉 조약문에 임금의 이름을 넣느냐가 큰 논란거리였습니다.

일본 측은 조약문에 고종의 어보(御寶 임금의 도장)를 찍고 이름도 써넣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조선 측은 어보만 찍을 것을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양국은 그 문제로 끝없이 언쟁을 하였습니다.

연무당 옛 터임을 알리는 표지석의 뒷면에는 이은상이 짓고 김충현이 쓴 비문이 새겨져 있다.

심행일기 속의 강화도조약

일본 측은 조약 비준에 있어서 반드시 어명이 들어간 어보가 있어야 진정한 수호가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국제법상 조약 당사자 간의 친필 사인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조선의 입장은 달랐습니다.

'어명어보(御名御寶)는 막중막엄(莫重莫嚴)해서 신자(臣子)가 감히 입에 올릴 수도 없는 것인데 하물며 어찌 감히 문서에 쓸 수 있겠는가.' 하면서 다른 것은 양보해도 그 문제에서만은 결단코 일본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다고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

이 문제를 두고 끝없이 언쟁하다가 밤을 새우고 첫 닭이 울 때 일본 측이 돌아갔던 적도 있다고 합니다.

지금의 관점으로 보면 국가 간의 조약에 대통령이나 총리의 서명이 들어가는 것이 당연하지만 당시 조선의 입장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왕이란 곧 하늘과도 같은 존재인데 신하된 자가 어찌 감히 왕의 이름을 입에 올릴 수 있으리오.

왕의 이름이 새겨진 옥새를 찍으라고 왕에게 청할 수는 더더군다나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조선 측에서는 극력 반대하며 고칠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

임금의 이름을 쓰는 게 뭐가 문제가 된다고 그렇게 신경전을 펼쳤을까요.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안건들도 많았을 텐데 왕의 체통을 지키는 일에만 온통 매달려서 옥신각신했습니다.

그러나 왕이 곧 나라였던 당시에는 왕의 수모는 곧 나라의 수모이기도 했으니 어떡하든 그것만은 막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조선측은 다른 쪽을 양보하면서까지 그 문제만은 지키려고 애를 썼던 것입니다.

그 문제로 회담이 성사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일본 대표단은 철수하겠다며 엄포를 놓기도 합니다.

그들을 구슬려서 다시 회담장으로 데려왔지만 조선 측은 시간에 쫓겨 다른 부분들은 잘 살피지를 못했습니다. 어명(御名)은 지켰지만 다른 부분은 일본이 의도한대로 되고 말았습니다.

임금님의 이름을 어찌 감히...

우물 안 개구리처럼 세계정세에 어두웠던 조선은 새로운 외교관계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임금의 이름을 뺀 어보만 찍을 것을 주장하다가 보니 여러 가지를 일본 측에 양보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일본이 제시한 12개의 조약안들은 대부분 그대로 통과되고 맙니다.

조일수호조규의 제7조는 '일본 항해자가 자유로이 해안을 측량하고 지도를 제작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곧 일본의 군사 침략 의도를 담고 있는 것이었는데도 미처 살피지 못했습니다.

또 제9조의 '양국 인민이 무역을 하는 데 있어 양국의 관리는 조금도 관여하지 못하며 제한·금지하지 못한다',

10조의 '일본인이 조선의 개항장에서 죄를 범한 경우에는 일본 관헌이, 조선인이 죄를 범한 것은 조선 관원이 심판한다' 부분의 해악 역시 미처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무역을 함에 있어서는 관세를 물리거나 제재를 가하는 부분이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상인이 교역을 하는 데 있어 조선은 아무런 관여를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들을 제한하거나 무역을 금지 할 수 없게 되었으니 이로써 조선은 경제적으로 일본에게 먹히는 운명이 되고 맙니다.

또 개항장에서의 치외법권을 인정해주게 되었으니, 일본인은 마치 자기 땅인 양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45년 전의 조선은 일본과 교역할 수 있는 게 농산물 밖에 없었습니다. 공산품은 전무한 형편에 일종의 자유무역인 무관세를 했으니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조선의 시장은 곧 일본 제품들이 판을 치는 독무대가 되었고, 끝내는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건물 한 채 남아 있지 않는 연무당 옛 터를 뭐 볼 거 있다고 가느냐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러나 그곳은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들려줍니다. 준비되지 않은 결과가 어떠한지를 말없이 웅변합니다.

연무당 옛 터를 보존한 까닭은...

1976년도 봄에 강화도를 방문하였던 박정희 대통령은 강화도조약을 체결했던 장소인 연무당에 들렀습니다. 망국의 전초가 되었던 곳에서 대통령은 만감이 교차한 듯합니다.

다시는 그런 수모를 겪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 박대통령은 비장한 마음으로 지시를 합니다. 쓰라린 역사를 기억해서 두 번 다시 그런 아픔은 겪지 말자고 합니다.

연무당 옛 터임을 알리는 표지석의 뒷면에는 이은상이 짓고 김충현이 쓴 비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지나간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 역사는 간단없이 흘러가되 교훈은 남는 것이니 이곳 연무당은 그 역사의 교훈을 듣는 데다. 이 연무당 터야말로 민족의 역사적 시련장이며 자주적 역량만이 사는 길임을 보여주는 곳이므로 이곳을 길이 보존하도록 하라.

오직 제 힘을 키우고 기른 다음에라야 어떤 고난이든지 능히 이길 수 있는 것이기에 그 뜻을 돌에 새겨 자손만대에 길이 전하기 위해 연무당 옛 터에 기념비를 세운다.”

기념비는 이런 글귀로 끝을 맺으며 145년 전의 그날을 되새기게 합니다.

체면이 밥 먹여주느냐는 말도 있습니다. 실속 없는 체면보다는 실리를 따지라는 말입니다. 과거 조선은 실리보다는 체면을 더 중시했던 점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큰 것을 놓치는 우를 범했습니다.

어느새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뼈아픈 역사가 스며있는 연무당 옛 터에도 가을바람이 불어옵니다.

시대의 물결에 올라타지 못해 출렁대고 좌초했던 조선이었습니다. 연무당 옛 터는 참담했던 그 시절을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과거를 딛고 일어섰습니다. 실패의 기억 속에 숨어 있지 않고 과거를 돌아보며 각성했습니다.

연무당 옛 터는 참담한 실패의 역사가 아니라 그것을 딛고 일어선 우리 민족의 저력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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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하구 2021-08-31 08:32:08
감사합니다.. 스치듯 지나가던 곳의 역사와 의미를 알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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