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미양요의 격전지 광성廣城돈대 A
신미양요의 격전지 광성廣城돈대 A
  • 이광식 작가(내가면 거주)
  • 승인 2021.08.28 21: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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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광식의 돈대순례 서른네 번째
-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833에 위치

광성보(廣城堡)에 소속된 3개의 돈대 중 하나인 광성돈대는 숙종 5(1679) 처음으로 축조된 강화 돈대 48개 중 하나이기도 하다.

다리미 바닥처럼 생긴 광성돈대의 앞부분이 강화해협을 향하고 있다. 복원된 성가퀴들, 포 3문, 포좌 4개가 보인다. (사진=문화재청)
다리미 바닥처럼 생긴 광성돈대의 앞부분이 강화해협을 향하고 있다. 복원된 성가퀴들, 포 3문, 포좌 4개가 보인다. (사진=문화재청)

돈대의 형태는 해안 지형에 따라 축조한 탓으로 서벽은 직선인 데 비해 동벽은 볼록한 반원형으로, 마치 다리미 바닥처럼 생겼고, 둘레는 142m.

광성보가 위치한 곳은 손돌목 해역으로, 삼남에서 경강(京江)으로 가는 수로의 요충이었다.

광성돈대의 돈문.
광성돈대의 돈문.

덕진진, 초지진, 용해진, 문수산성 등과 더불어 강화해협을 지키는 중요한 요새인 광성보(사적 제227)는 원래 고려 때 외성이었던 것을 효종 9(1658)에 전면적으로 개보수하여 해안경비부대 주둔지인 보()로 자리 잡았다.

뒤이어 숙종 5년에 축조한 용두·오두·화도·광성 등의 소속 돈대와 광성포대를 거느림과 동시에 성채도 완전 석성으로 개축함으로써 돈대와 포대, 외성이 긴밀하게 연계된 3중 방어체제를 완비하게 되었다.

여기에 손돌목 해역의 거센 조류와 산재한 암초들이 더해져 광성보는 천혜의 요새로 자리매김하였다.

이처럼 강화도 수비군의 총사령부 격으로 중요한 군사기지로 역할을 했던 광성보는 영조 21년 광성보 성을 개축하면서 성문을 건립했는데 이를 안해루(按海樓)라고 불렀다.

광성돈대와 안해루.(사진=문화재청)
광성돈대와 안해루.(사진=문화재청)

광성돈대 앞에 흐르는 강화해협은 마포와 양화진으로 직항할 수 있는 수로의 길목으로, 한양을 지키는 중요한 군사 요충지였다. 이런 지형적 이유로 인해 병인-신미양요의 전화를 피할 수 없었다.

고종 3(1866) 병인양요가 발발하자 프랑스군과 치열한 공방전이 펼쳐졌고, 고종 8(1871) 신미양요 때는 미군 함대에 의해 초지진·덕진진에 이어 광성보마저 포위공격을 받는 등 가장 격렬한 격전지가 되었다.

여장 너머로 보이는 강화해협. 고요히 흐르고 있다.
여장 너머로 보이는 강화해협. 고요히 흐르고 있다.

18668월 발생했던 제너럴셔먼호 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1871, 통상을 요구하며 전함 5척을 이끌고 불법적으로 침범해온 미군 해병대에 맞서 격렬한 전투를 벌였던 것이 바로 광성보 전투다.

제너럴셔먼호 사건-1866(고종 3) 7월 통상을 요구하며 대동강에 불법 진입한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평양에서 군민의 화공으로 불타버린 일.

광성보 안에서 바라본 안해루와 광성돈대.(사진=문화재청)
광성보 안에서 바라본 안해루와 광성돈대.(사진=문화재청)

423일부터 다음 날까지 48시간 동안 어재연 장군이 이끄는 600여 명의 조선 병사들은 열세한 무장에도 불구하고 한 발짝도 물러섬이 없이 맹렬히 싸웠다.

그러나 1,230여 명의 신무기로 무장한 미국 해군을 맞서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당시 미군은 9인치, 8인치 등 85문의 대포를 쏘아댔으나, 조선군은 정조준조차 안 되는 대포와 소포가 전부였다.

홍이포는 포구에서 화약과 포탄을 장전한 후 포 뒤쪽 구멍에서 점화해 사격하는 포구장전식 화포이다.

광성돈대 포좌. 모두 4개로 염하 쪽을 향하고있다.
광성돈대 포좌. 모두 4개로 염하 쪽을 향하고있다.

사정거리 700m 정도이며, 포알은 화약의 폭발하는 힘으로 날아가지만, 포알 자체는 폭발하지 않아 위력은 약하다. 게다가 대포는 조준이 안 되나 소포는 조준이 된다.

소포는 불량기라 하며 프랑스군이 쓰던 것으로, 사정거리 300m로서 포알은 대포와 같다. 병자호란에도 사용되었다고 하는 이 홍이포는 어떤 면에서도 근대적인 미군의 대포와는 상대가 되지 않는 무기였다.

신미양요 당시 사용했던 포 3문이 복원되어 전시되고 있다.
신미양요 당시 사용했던 포 3문이 복원되어 전시되고 있다.

미군의 전쟁사에 ‘48시간 전쟁으로 기록되어 있는 광성보 전투에서 조선의 군대는 어재연 장군을 포함해 430여 명이 전사하고 20여 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광성보와 돈대들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광성보 전투의 조선군 전사자들. 한 참전 미군이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흰옷을 입은 243명의 시체가 성채 안과 주변에 누워 있었다. 그들 중 다수는 이제는 다 밖으로 튀어나온 흩어진 솜 갑옷을, 아홉 겹으로 솜을 두른 갑옷을 입고 있었다. 살이 타는 역겨운 냄새가 공기중에 진동했다.(...) 어떤 부상자들은 자신의 고통보다 미국인 체포자들을 더 끔찍이 두려워하며 서서히 불에 타 죽어갔다."
광성보 전투의 조선군 전사자들. 한 참전 미군이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흰옷을 입은 243명의 시체가 성채 안과 주변에 누워 있었다. 그들 중 다수는 이제는 다 밖으로 튀어나온 흩어진 솜 갑옷을, 아홉 겹으로 솜을 두른 갑옷을 입고 있었다. 살이 타는 역겨운 냄새가 공기중에 진동했다.(...) 어떤 부상자들은 자신의 고통보다 미국인 체포자들을 더 끔찍이 두려워하며 서서히 불에 타 죽어갔다."

1977년 전적비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돈대와 안해루 등이 복원되고 돈대 안에는 포좌 4개소와 포 3문을 복원 설치했다.

다리미 바닥처럼 생긴 돈내 내부. 여장(성가퀴)까지 완전히 복원되었다.
다리미 바닥처럼 생긴 돈내 내부. 여장(성가퀴)까지 완전히 복원되었다.

광성보 경내에는 신미양요 때 순국한 어재연 장군의 쌍충비와 신미순의총 및 전적지를 수리하고 세운 강화전적지, 수리한 것을 기록한 비석 등이 건립되었다.

끝으로 반가운 소식 하나를 전한다면, 지난 71일부터 그동안 유료 관람이었던 광성보, 덕진진, 초지진, 갑곶돈대 등이 모두 무료로 전환되었다고 한다.

물론 그전에도 강화군민에게는 입장료를 받지 않았지만, 이제부터는 외지인이라도 무료관람을 할 수 있는 만큼 많은 사람이 이 유서 깊고 아름다운 강화 돈대를 찾을 것으로 보인다. A등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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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대 복원 등급]

A등급: 여장을 포함, 복원이 거의 온전하게 이루어진 돈대.
B등급: 복원이 이루어졌으나, 불완전 복원으로 여장 등은 복원되지 않은 돈대.
C등급: 돈대 축대 중 기초 부분 정도만 남아 있는 돈대로, 복원작업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돈대.
D등급: 돈대의 기초부분만 약간과 돌 무더기만 있을 뿐, 주변 정리도 전혀 돼 있지 않은 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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