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저히 버려진 양암-갈곶 두 돈대 D
철저히 버려진 양암-갈곶 두 돈대 D
  • 인터넷 강화뉴스
  • 승인 2021.04.05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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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식의 강화돈대 순례 열세번째 이야기
-양암: 강화군 길상면 선두리 840에 위치
-갈곶: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 산 47-1에 위치

선두포의 갯골 수로를 방어하기 위해 마주보는 위치에 축조된 양암돈대와 갈곶돈대는 태생처럼 마지막 운명도 닮은꼴이었다.

숙종 32(1706) 간척을 위해 선두포와 가릉포에 조선후기 강화 최대 길이 제방인 선두포언과 가릉포언이 갯골 수로를 가로막으면서 드넓은 선두평과 가릉평이 만들어졌고, 이로써 마니산이 있는 고가도(古加島)가 강화 본섬과 연결되었다.

제방을 만들면서 포구의 기능을 상실하자 양안에 축조된 양암, 갈곶 돈대도 그 효용성이 사라짐으로써 돈대로서의 기능이 막을 내리고 1718년 폐돈의 운명을 맞게 되었다.

두 돈대가 세워진 것이 숙종 5년이었으니까, 40년 만에 혁파된 셈이다. 그리하여 4백 년이 흐른 지금에도 철저히 버려진 채 폐허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어 찾는 이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강화 간척사업의 전개 지도. 선두포언과 가릉언이 축조되어 드넓은 선두평이 생겼다.(출처:고려대 최영준 교수의 <국토와 민족생활사>) 

이 같은 조선조의 강화도 간척사업은 다분히 외침에 대비해 식량 확보를 위한 것으로, 위급한 상황이 오면 강화를 왕실의 긴급 피난처로 삼기 위한 목적이기도 했다.

이리하여 양암-갈곶 두 돈대는 식량 조달을 위한 간척사업에 그 자리를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사례는 비단 선두평 뿐만이 아니었다. 강화의 평야는 거의 간척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원래는 다 바다였다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다.

고려대 최영준 교수의 <국토와 민족생활사>에 따르면, 이 같은 간척사업은 지속적으로 전개되어 오늘에 이르러서는 강화도 전체 면적(424)30%에 해당하는 130의 간척지가 평야로 탈바꿈했다.

이는 여의도 면적(2.95)44배에 달하는 방대한 면적이다. 국내에서 한 지역에 이처럼 넓은 간척지가 있는 곳은 강화 외에는 찾아보기는 어렵다.

복잡했던 강화도 해안선은 이 같은 간척으로 인해 현재의 단조로운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양암돈대는 다 허물어져 페허가 되고 말았지만, 돈문의 기둥돌인 문주석은 그대로 남아 있다. 

340년 전 숙종 5(1679)에 만들어진 48개 돈대 중의 하나인 양암돈대는 이처럼 돈대 중 가장 부침을 많이 겪은 돈대의 하나로, 지금은 형태는 간 곳 없고, 돌무더기만 남아 있는 폐허로 존재하고 있다.

현재 돈대의 성벽과 석축 일부가 남아 있으나 문화재로 지정되지는 않았다.

양암돈대의 형태는 사방 폭이 37m 정도인 정사각형이고, 둘레는 143m.

 동면 성곽 위에서 바라본 돈대 상단부. 과거엔 성가퀴(여장)도 있었을 것이다.

현재는 하단의 2~3단 면석만 남아 있고, 포좌들이 있던 남--북면은 완전히 훼손된 상태이며, 동쪽에 남아 있는 좌우 문주석을 통해 돈대 문터를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동면의 오른쪽 문주석. 높이가 166cm다.

다만 포좌는 덮개돌의 현존 상태로 추정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제방이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이 돈대 앞에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 돈대 위에 서서 남쪽을 바라보면 드넓은 선두평 너머로 마니산과 초피산이 보인다.

도로 쪽에서 바라본 양암돈대의 폐허. 멀리 뾰족한 초피산과 마니산이 보인다. 선두포와 가릉포를 막기 전에는 바다로 떨어져 있던 고가도라는 섬이었다.

양암돈대 안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민간의 경작지로 사용되었으나, 지금은 경작이 금지되고 밭자리만 남아 있다.

얼마 전까지도 밭으로 쓰였던 돈대터. 지금은 경작금지 팻말이 하나 꽂혀 있다. 그 너머로는 개간 전에는 모두 바다였다. 50년 전 박정희 정권 때 대대적인 추가 간척사업이 이루어져 바닷물이 들락거렸던 곳이 넓은 논벌이 되어버렸다. 생활 터전을 잃어버린 어민들은 보상도 전혀 못 받아 지금도그 생각에  자다가 벌떡 일어난다고 한다.

폐돈이 된 지 3백 년이 더 지났을 뿐더러 인가들이 가까이 있는 평지에 돈대가 있는데도 면석으로 쓰였던 돌무더기들이 상당량 남아 있는 것이 희한하게 생각된다.

문주석이 있는 동쪽에 가지런히 쌓여 있는 돈대의 면석 무더기.  누군가가 돈대 석재들을 모아놓은 듯하다.

무너진 면석들이 한 줄로 가지런히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 유적을 보호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함부로 돈대를 훼손하면 큰 화를 입는다는 민간신앙도 한몫했을 것으로 보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 있던 낡은 안내판이 치워지고 관계당국이 세운 말끔한 안내판. 다행히도 잊혀지지는 않은 듯해 반갑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 있던 낡은 안내판이 치워지고 관계당국이 세운 말끔한 안내판. 다행히도 잊혀지지는 않은 듯해 반갑다.

어쨌든 땅 속을 뒤지면 더 많은 석재들이 발굴될 것으로 보여, 복원에 나서면 웬만큼 원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 섞인 기대를 해본다.

세월이 더 지나기 전에 복원작업이 이루어지길 바랄 뿐이다.

갈곶돈대 안내판이 나무에 기대어져 있다. 돈대 터에는 뱀그물과 뱀덫들이 늘려 있다. 한쪽에는 분묘도 있었다.

선두평을 사이에 두고 마주 바라보이는 갈곶돈대의 상황은 양암돈대보더 더 참담하다.

높다란 갈곶 정상에 터 잡은 이 돈대는 한때 위용을 자랑하던 성벽을 이루었을 석재들이 거의 다 사라지고 남아 있는 거라곤 돌무더기 두엇뿐이다.

지대가 상당히 높고 가파른 점을 감안하면, 이는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석재 반출작업이 이루어졌을 거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아마 제방을 보강하기 위해 석재들을 반출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현재는 면석들이 거의 남아 있지 않고 약간의 기와편·백자편만이 뒹굴고 있을 뿐, 겨우 터만 확인할 수 있을 정도이다.

기단석 일부만이 남아 있는 갈곶돈대. 돌의 색깔이 특이하게도 붉은빛을 띠고 있다.
기단석 일부만이 남아 있는 갈곶돈대. 돌의 색깔이 특이하게도 붉은빛을 띠고 있다.

사정이 그러하니 관계당국에서도 어떻게 손써볼 방도가 없긴 하겠지만, 그래도 안내판 하나 나무에 기대놓은 게 전부라니, 너무 무심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최소한 주변 접근로 정비와 돈대 표지판 정도는 세워줄 수도 있을 텐데 여러모로 아쉬운 느낌을 갖게 하는 돈대다.

칠온지돈대로도 불리는 갈곶돈대의 형태는 토축의 형태로 미루어보아 동서간 35m, 남북간 15m의 장방형 돈대였으며, 동향을 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돈대 내부에 건물을 두어 창고와 수직(守直)하는 병사의 숙소로 삼았다. 돈대 문터는 현재로서는 확인하기 어려우며, 포좌가 몇 개 있었는지 역시 알 수 없다.

본격적인 발굴 작업이 이루어지면 그래도 어느 정도 원형을 그려볼 수 있을 것으로 짐작될 뿐이다.

드넓은 선두평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 멀리 보이는 산 아래 어디쯤 양암돈대가 있다.

선두평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양암-갈곶 두 돈대가 만약 복원되어 원형을 되찾는다면 드넓은 선두평 들머리를 장식하는 아름다운 조형미를 자랑하는 유적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D등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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