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곶돈대에는 '돈대'가 없다
갑곶돈대에는 '돈대'가 없다
  • 이광식 작가(내가면 거주)
  • 승인 2021.02.15 10:4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이광식의 강화돈대 순례, 일곱번째 이야기
- 강화군 강화읍 갑곳리 1020 소재

한국 전쟁사에서 최고의 '핫 포인트'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 강화의 갑곶돈대일 것이다.

갑곶돈대의 '돈대'. 그러나 기실은 조선시대 사용한 대포를 전시하는 공간이다. 뒤로 구 강화대교가 보인다.(사진=문화재청) 

'갑곶'이라는 지명에 대해서는 삼국시대 강화를 갑비고차(甲比古次)라 부른데서 갑곶 이름이 전해오는 것으로 보기도 하고, 고려 때 세계를 평정한 몽골군이 이곳을 건너려 하다 뜻을 이루지 못해 안타까워하며 우리 군사들이 갑옷만 벗어서 바다를 메워도 건너갈 수 있을 텐데한탄했다는 말에서 유래했다는 전설도 있다.

염하 쪽에서 바라본 갑곶돈대 성가퀴들. 뚫린 구멍들이 총을 내놓고 쏘는 총안이다.(사진=문화재청)

강화대교를 건너자마자 왼편에 자리잡은 갑곶은 우리 민족의 한 서린 역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지점이다. 육지에서 강화로 들어오는 제1관문이었던 갑곶은 1232년 고려가 강화로 천도한 이후 1270년까지 몽골과의 줄기찬 항전을 계속하며 강화해협을 지키던 중요한 요새다.

적진을 살필 수 있는 진해루(鎭海樓)가 있었으며, 해협 건너편의 문수산성 서쪽 성문인 취예루를 마주하고 있었다. 40년에 걸친 항몽전쟁에서 이 갑곶을 굳세게 지킴으로써 몽골군은 결국 염하를 건널 수가 없었다.

총안들이 뚫린 돈대의 성가퀴들. 염하 쪽을 향하고있다.

그러나 그로부터 400년 후 1636, 병자호란을 맞은 조선의 상황은 전혀 달랐다. 조선군이 물살 빠른 염하만 믿고 방심한 틈을 타서 청병들은 민가를 헐어 뗏목을 만들어 손돌목의 거센 물살을 헤치고 염하를 건너와 갑곶을 치고 강화를 함락시키고 말았다.

그리하여 백성들은 청병의 칼날 아래 어육(魚肉)의 신세를 면치 못했고, 적군을 피해 달아나던 부녀자들은 염하로 뛰어들어 머리에 맨 흰 수건이 마치 낙엽처럼 강물 위에 떠다녔다고 한다.

총안으로 내다본 염하 풍경. 구 강화대교가 가로지르고 있다.

갑곶에 돈대가 들어선 것은 그로부터 40년 후인 숙종 5(1679)이다. 강화의 전략적 중요성을 통감한 조정에서 강화 방비를 강화하기 위해 강화 해안선을 따라 48개의 돈대 축조에 나섰다.

이 거국적인 대역사는 병조판서 김석주의 기획-감독과 강화유수 윤이제의 지휘로 진행되었는데, 황해·강원·함경도 승군 8,900명과 어영청 소속 어영군 4,262, 석수 등 전문인력 2천 명이 투입되어 80일 만에 마무리되었다. 채석 및 운반 등 준비기간을 포함하면 총 6개월이 걸렸다.

돈대 전각에 전시되어 있는 홍이포(紅夷砲). 17세기 초 명나라 군대가 네덜란드와 전쟁을 치를 때 중국인들은 네덜란드인을 ‘홍모이(紅毛夷)', 네덜란드인들이 사용하던 대포를 ‘홍이포’라 불렀다. 사정거리 700m로서 포알은 화약의 폭발하는 힘으로 날아가나 포알 자체는 폭발하지 않아 위력은 약하다. 병자호란에도 사용했다.

48개 돈대 중 가장 중요한 요충이었던 갑곶돈대는 통진에서 강화로 들어가는 갑곶나루에 축조했는데, 돈대 주위가 113()였고 성벽 위에 낮게 쌓은 성가퀴인 치첩(雉堞)40개였다고 한다. 부근의 망해·제승·염주돈대와 함께 제물진의 관할 하에 있었고, 8문의 대포를 설치한 갑곶포대를 갖추었다.

돈대 남쪽에는 수문이 있었으며, 강화외성과 연결되었다. 강화외성은 강화도 동해안 방어를 목적으로 고려 고종 20(1233)에 축조한 성으로, 북쪽의 적북돈대부터 초지진까지 그 길이가 약 23km에 이른다.

돈대 성가퀴 앞에 전시된 불랑기포와 소포. 실전에서 사용한 포들이다.

이처럼 호국 1번지의 위치에 있었던 갑곶돈대는 19세기 중엽 다시 외적의 침략을 맞아 한 차례의 격전을 치렀다. 18669, 천주교도 박해를 이유로 프랑스 함대가 침략한 병인양요 때, 적군 600명을 맞아 격렬한 전쟁을 치른 데도 이곳이다.

프랑스 군은 103일 양헌수 장군이 이끄는 정족산성 전투에서 대패한 후, 그동안 약탈했던 수많은 문화재를 챙겨 서둘러 퇴각했다.

이섭정(利涉亭). 최초로 1398년(태조 7) 강화부사 이성(李晟)이 세웠다고 한다. 고려 때 몽골과의 협상에서 우리측이 이롭게 되기를 염원하고 외교사신들을 영접, 환송하기 위해 지은 강화도 관문의 팔각정이다.

그로부터 10년 뒤인 1876, 일본의 전권대신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6척의 함선을 이끌고 와 갑곶으로 상륙한 뒤 운요호 사건의 책임을 물어 강압적으로 강화도 연무당(鍊武堂)에서 조선의 접견대관 신헌(申櫶)과 강화도 조약(한일수호조규, 병자수호조약)을 맺었다.

그 뒤 갑곶돈대은 허물어져 일부만 남았던 것을 1977년 강화의 다른 전적지와 함께 새로이 옛모습을 되살려 복원이 이루어졌다. 지금 돈대 안에 대포와 소포 2문 등을 새로 만들어 설치·전시되고 있는데, 전시된 대포는 조선시대 것으로, 강화해협을 통해 침입하는 왜적의 선박을 포격하던 것이다.

갑곶돈대를 한번 둘러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사실 현재의 갑곶돈대에는 돈대라면 응당 갖춰야 할 포좌가 없다. 그래서 갑곶돈대에는 '돈대'가 없다는 말들을 한다.

담 너머 뒤쪽 언덕받이 부근이 원래 갑곶돈대가 있던 곳이다. 구 강화대교 공사 때 훼손되었다.

사실 현 갑곶돈대의 위치는 제물진 터이고, 갑곶돈대의 원래 위치는 구 강화교 입구 부근으로 추정하고 있다. 다리를 놓으면서 돈대가 훼손된 것으로 전해진다. 이곳에서 면석으로 추정되는 석재들이 간간이 보인다.

원래의 갑곶돈대 하부는 암반으로 되어 있어 돈대 설치에 매우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북쪽으로는 갑곶나루가 위치하고 있어서 김포의 문수산성과 통할 수 있는 통로로서 활용되었으나 현재는 그 자취를 찾을 수 없다. 남쪽으로는 강화전쟁박물관이 위치하고 있다.

갑곶나루 앞에 있었던 강화외성의 문루 진해루 옛모습(1890년대). 현재 복원공사 중이다.

갑곶돈대 아래 강화대교와 구 강화대교 사이에 있었던 진해루는 강화외성 축성 당시 조성되었던 6개의 문루(조해루, 복파루, 진해루, 참경루, 공조루, 안해루) 중 하나로,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내륙에서 염하강을 건너 갑곶나루를 통해 강화도로 들어오는 갑문 역할을 했던 가장 중요한 길목의 문루였다. 현재 복원 공사 중으로 거의 완공단계에 이르고 있다.

결론적으로 '호국 1번지 갑곶돈대'는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 구 강화대교도 용도폐기된 상황이니까 원래의 갑곶돈대 복원 문제도 심도 있게 다룰 때가 되었다고 본다.

 

* 강화뉴스의 힘은 후원독자님의 성원입니다. 구독회원 가입 부탁드립니다. https://forms.gle/3zSDHP5s9we9TcLd9
* 강화뉴스를 카톡으로 받아보시려면 링크를 클릭하여 '채널추가' 해 주세요. http://pf.kakao.com/_xeUxnGC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인천광역시 강화군 남문안길 17 2층
  • 대표전화 : 032-932-0222
  • 팩스 : 032-932-0949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박제훈
  • 법인명 : 강화언론문화협동조합
  • 제호 : 인터넷 강화뉴스
  • 등록번호 : 인천 아 01079
  • 등록일 : 2015-10-30
  • 발행일 : 2012-03-18
  • 발행인 : 박흥열
  • 편집인 : 박흥열
  • 인터넷 강화뉴스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열린보도원칙」 당 매체는 독자와 취재원 등 뉴스이용자의 권리보장을 위해 반론이나 정정보도, 추후보도를 요청할 수 있는 창구를 열어두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고충처리인 박제훈 032-932-0222, esim92@naver.com
  • Copyright © 2021 인터넷 강화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ganghwanews@hanmail.net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