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에 남은 박정희 시대의 유산 - 갑곶돈대
강화도에 남은 박정희 시대의 유산 - 갑곶돈대
  • 이승숙 작가(양도면 조산리)
  • 승인 2021.02.15 10:01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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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와 함께 걷는 강화나들길6

강화의 역사 유적지 중에는 초지진처럼 축소 복원된 곳이 또 있다. 강화역사 기행의 일번지로 불리어졌던 '갑곶돈대'가 바로 그곳이다.

사적 제 306호인 갑곶돈대는 옛 강화역사박물관과 같이 있어서 강화를 찾는 사람들이 첫 번째로 둘러보던 명소였다역사박물관이 고인돌광장으로 이전하면서 찾는 이들의 발걸음이 다소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명성은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갑곶돈대는 강화도를 방어하던 53개 돈대 중의 하나다. 그중 강화의 동쪽 해안에 20개의 돈대가 몰려 있었다. 그것은 곧 돈대가 강화의 바다를 경계하는 것이기도 하면서 아울러 수도인 서울을 지키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강화대교가 놓이기 전에는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야만 육지와 닿을 수 있었다. 갑곶나루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곳이었다. 강화에서 서울로 갈 때도 갑곶나루를 이용했지만 서울에서 강화로 들어올 때도 역시 마찬가지로 이곳을 거쳐야만 했다.

현재의 갑곶돈대

강화도의 관문 갑곶진

옥좌에서 끌려 내려온 패군 연산과 광해는 이 나루를 통해 강화도로 유배를 왔고 정묘호란 때 인조 임금은 이 나루를 통해 강화도로 건너와 난리를 피했다.

또 하루 아침에 지존이 된 철종 임금 원범은 갑곶나루를 건너 서울로 올라가서 왕이 되었다. 말하자면 갑곶나루는 강화도로 들어오는 관문이었고 나루터 옆에 있던 갑곶돈대는 마치 강화도를 지켜주는 수문장과도 같은 존재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갑곶나루 옆의 언덕에 갑곶돈대가 있었다. 갑곶돈대는 강화해협을 거슬러 올라올지도 모를 적함들을 경계하며 혹시 모를 외적의 침입에 대비했다.

갑곶진에 속해 있던 여러 돈대 중의 하나였던 갑곶돈대는 상부 군사시설이었던 갑곶진의 전면에 위치해있어 전투가 벌어졌을 때 앞서서 싸웠던 곳이기도 했다. 상주하는 군사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규모는 지금 복원되어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장대했다.

그러나 현재 복원된 갑곶돈대는 협소하기 짝이 없다. 바다 쪽으로 툭 튀어나온 치성과 대포 두 문만이 보이니 그렇게 여기지 않을 수 없다.

병자호란을 비롯해서 병인양요 등의 외침을 당했을 때 우리의 선조들이 목숨을 걸고 싸웠던 전장이 이렇게 작고 옹색하다니, 선현들의 항쟁에 의문을 품으며 우리 역사가 빈약하다고 여길 수도 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갑곶돈대의 일부분일 뿐이다. 원래의 갑곶돈대는 지금보다 훨씬 규모가 컸다. 또한 지금의 자리뿐만 아니라 옛 강화대교가 시작되는 바위 언덕까지도 원래의 갑곶돈대가 있던 자리였다.

1970년도 중반에 박정희 대통령은 전적지 보수 정화사업을 문화정책의 핵심기조로 내걸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강화도의 전적지를 보수 정화할 것을 지시했다. 강화도의 여러 유적지들 중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때의 유적지들을 특별히 호국유적지로 이름 붙이고 정화사업을 시행했다.

서울대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강화부지도> 중 갑곶돈대 부분. 이 지도의 제작 시기는 1875~1894년 경으로 보고 있다. 
(사진출처 : 강화역사문화연구소)

옛) 지도 속의 갑곶돈대

그런데 문제는 갑곶돈대였다. 대통령의 특별 명령이니 반드시 복원해야 하는데 그 자리에는 강화대교가 들어서 있었기 때문에 돈대를 복원할 자리가 없었다. 그래서 갑곶돈대의 일부분에 성곽 보수공사를 하고 갑곶돈대라고 이름을 붙였던 것이다.

육지와 연결되는 다리를 놓는 것은 강화도민들의 오랜 숙원이었다. 1965년도에 다리 공사가 시작될 때 최적의 장소로 선정된 곳은 갑곶돈대 자리였다. 당시에는 어느 누구도 입지 선정에 대해 불만을 가진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강화도민의 오랜 숙원사업이었던 다리가 놓인다는데, 흔적만 남아있는 유적지 따위에 가치를 두었을 사람이 얼마나 있었을까. 설혹 그 자리가 갑곶돈대 터임을 알고 있다고 한들 육지와 연결되는 다리를 놓는 열망에 비하면 그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197012일에 있었던 다리 개통식에 참여한 수많은 사람들 중 갑곶돈대의 가치를 깨달은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었을까. 당시에는 먹고 살기에 바빴던 시절이라 문화재에 대한 관심이 적었다. 그러니 지금의 기준으로 그때를 탓할 일은 아니라고 본다.

그러나 문제는 몇 년 후에 발생한다. 1976,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강화도의 전적지들을 보수 정화하라고 지시를 한다. 강화해협을 따라서 있는 초지진과 덕진진 그리고 광성보를 복원하고 정화하는 사업이 그때 벌어졌다.

그때 갑곶돈대가 문제거리로 떠올랐다. 원래 자리에 강화대교가 들어섰으니 관계자들은 난감했을 것이다. 돈대를 복원할 자리에는 다리가 놓여있으니 어떻게 복원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갑곶돈대의 치성 부분을 복원하고 갑곶돈대로 이름을 붙이기로 했을 것이다.

()’란 성벽의 일부를 바깥으로 돌출하도록 쌓아서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에게 정면과 측면에서 함께 공격할 수 있도록 각이 지게 만든 성곽 시설물을 말한다.

갑곶돈대는 바다 쪽으로 튀어나온 언덕의 암벽을 성벽 삼아 그 옆으로 이어지게 성곽을 쌓은 곳으로 현재 갑곶돈대가 있는 자리에는 앞으로 툭 튀어나오게 치를 쌓았다.

치성이 돈대로 탈바꿈했다

갑곶돈대를 찍은 옛 사진에서 봐도 알 수 있다. 1876(고종 13) , 운요오호 사건 이후 일본과 맺은 강화도조약 때 일본 대표단이 찍은 사진에는 갑곶돈대의 모습이 현재와는 다르게 나타나 있다.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당시 일본 변리사절단의 일원이었던 가와다 키이치가 찍은 갑곶돈대의 모습(사진 출처 : 강화역사문화연구소)

사진 속에 두 명의 군사가 서 있는 치() 부분이 둥그스럼한 곡()선 모양으로 되어 있어 현재의 직사각형으로 복원된 돈대의 모습과는 차이가 있음을 볼 수 있다.

조선시대 지도에서 봐도 갑곶돈대는 현재보다 훨씬 더 컸음을 알 수 있다. 19세기 후반에 제작된 '강화도지도' 중 갑곶돈대 부분을 자세히 살펴보면 지도의 맨 왼쪽에 동락천의 물이 바다로 들어가는 수문이 있고 그 옆에 장방형의 치성이 불쑥 튀어나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치성에서 한참 간 곳에 네모나게 성을 쌓은 곳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강화로 들어오는 관문 역할을 했던 진해루와 나루터의 석축로까지 자세히 그려놓았다.

이 지도는 8폭으로 된 병풍인데 제1폭은 정족산성 일대를, 2폭은 갑곶진을 그리고 있다. 또 제3폭은 광성보 일대, 4폭은 인화보 일대, 5폭은 월곶진 일대를 그렸다. 그 외 덕진진과 문수산성 등을 자세히 그려놓았는데 특히 광성보와 덕진진 주변의 포대(砲臺)와 총을 쏠 수 있도록 해놓은 총혈의 수도 기록해 놓았다.

현재 서울대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이 지도를 통해서도 갑곶돈대가 현재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강화외성의 한 줄기이기도 한 갑곶돈대는 현재의 치성 부분 뿐만 아니라 그 옆의 암벽까지 모두를 포함하고 있었다.

서울대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강도부지도'를 통해서도 갑곶돈대의 면모를 살펴볼 수 있다. 이 지도는 1875년 일본의 운양호 포격 사건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도로는 붉은색으로 표현하였으며 강은 청색으로 자세하게 그렸다.

19세기 후반에 제작된 <강화도지도> 중의 갑곳돈대 부분. 8폭으로 된 병풍으로 현재 서울대 박물관에 있다. 
(사진 출처 : 강화역사문화연구소) 

잘못 복원한 유적, 바르게 고쳐야...

이 지도에서는 갑곶진에 속해있던 염주돈과 갑곶돈이 나타나 있으며 갑곶돈대의 경우 석수문과 바다 쪽으로 툭 튀어나와 있는 치성 부분도 역시 자세히 묘사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진해루 옆에 갑곶돈이라고 명시되어 있는 부분이 원래의 돈대 자리였지만 현재 그곳은 구강화대교가 놓여있을 뿐만 아니라 카톨릭 갑곶성지로 편입되어 있기도 하다.

1970년대 당시 속전속결로 문화유적지들이 보수되고 정화되었다. 그 많은 유적지들이 불과 일 년여 만에 복원되었으니 부실했을 것은 안 봐도 환히 알 수 있는 일이다. 철저한 고증을 거친 후에 복원 작업을 해야 했음에도 성급하게 공사를 했을 터이니 잘못된 곳이 어디 한두 군데였겠는가.

비단 이러한 일들은 강화도에만 국한되는 사항은 아니었을 것이다. 당시 정화 복원된 많은 문화 유적 가운데는 이처럼 잘못된 것들이 또 있을 것 같다.

졸속 행정과 복원은 그때만의 일은 아니었다. 그로부터 4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여전히 잘못을 범하고 있다. 과거의 잘못을 보고 배워야 함에도 우리는 아직도 반성하지 못하고 졸속 행정에 부실 공사를 남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하면 된다'는 식의 구호가 지배했던 지난 1970년대의 흔적이 바로 현재의 초지진과 갑곶돈대에 남아 있다. 모르고는 넘어갈 수 있지만, 알고 어찌 그냥 지나칠 것인가.

이것은 어쩌면 또 다른 역사 왜곡일지도 모른다. 잘못 복원한 문화 유적들을 바로 고치고 제자리를 찾아주는 것은 조상이 물려준 것을 바르게 이어받는 길일 지도 모른다. 그것은 어쩌면 역사의 복원이고 민족혼의 자리매김을 바르게 하는 작업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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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용 2021-02-16 06:59:29
좋은 기사 감사합니다.
잘못 복원한 문화 유적들을 바로 고치고 제자리를 찾아주는 것은 조상이 물려준 것을 바르게 이어받는 길일 지도 모른다. 정말 공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