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에 남은 박정희 시대의 유산 - 강화 초지진
강화도에 남은 박정희 시대의 유산 - 강화 초지진
  • 이승숙 작가(양도면 조산리)
  • 승인 2021.02.15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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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와 함께 걷는 강화나들길 5

여러 날 바람이 맵차게 불더니 오늘은 좀 누그러진 듯하다. 그늘진 곳에는 더러 눈이 쌓인 곳도 있지만, 양지에는 언제 눈이 왔느냐는 듯이 물기 하나 없다.

바다와 바짝 붙어있는 초지진 광장에는 가끔씩 칼바람이 훑고 지나간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옷깃을 깊숙이 여미며 바람이 부는 반대 방향으로 몸을 돌린다.

초지진

추운 날인데도 초지진을 보러온 사람들이 있다. 워낙 이름이 알려진 유적지이니 찾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대부분 주차장에 서서 성벽과 소나무만 올려다 볼 뿐 초지진 안으로 들어가서 살펴보는 사람은 드물다.

포탄을 맞은 흔적이 있는 두 그루의 소나무만이 그런 사람들을 묵묵히 내려다보며 초지진의 지난 역사를 말없이 들려준다.

사실 초지진은 알려진 이름에 비해 볼 만한 게 별로 없다. 뭔가 대단한 걸 기대했던 사람들에게 규모가 작은 초지진은 그다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지도 않는다.

그래서 입장권을 끊고 초지진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보다 그냥 밖에서 성벽과 소나무를 올려다보는 것으로 대신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

초지진 앞 소나무에 남아있는 포탄의 상흔

포탄 맞은 흔적 있는 초지진의 소나무

사적 제225호로 지정되어 있는 초지진은 우리 역사 속에 여러 번 등장한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때 이곳에서 프랑스 및 미국 함대와 싸웠고, 1875(고종 12)에는 연안을 마음대로 측량하고 다니던 일본 군함 운요호와의 무력 충돌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그로 인해 일명 강화도조약으로 불리기도 하는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를 맺게 되었으며 그 뒤 우리나라는 일본의 손아귀에 빠지는 불행한 역사를 겪기도 한다.

초지진은 강화해협의 길목에 있어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그래서 지키는 병사들도 많았다.

군관(軍官) 11명에 사병 98, 그리고 돈대에서 바다를 경계하는 돈군(墩軍) 18 명 등을 두고 앞 바다를 통한 적의 침입을 경계했다.

초지진에는 초지돈(草芝墩장자평돈(長者坪墩섬암돈(蟾巖墩)이 소속되어 있었고, 포대에는 9개의 대포가 배치되어 있었다. 백여 명의 군사들이 초지진과 부속 돈대들을 지키고 관리했던 것이다. 이 사실만 봐도 초지진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을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초지진을 보면 왜소하기 짝이 없다. 19세기 중엽에 외세의 침입을 온 몸으로 견뎌내고 막은 초지진인데 현재 복원된 초지진에서는 그런 면모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나마 포탄을 맞은 흔적이 있는 두 그루의 소나무에서 당시의 치열했던 전투를 상상할 수 있을 뿐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킨 선조들의 기상을 떠올릴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

원래의 초지진은 지금 우리가 초지진이라고 부르는 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 횟집과 모텔 그리고 주유소 등이 자리해 있는 바닷가 언덕이 원래 초지진의 자리였다고 한다.

초지진은 지금으로 보면 대대 규모였고 초지돈대는 초지진에 속한 소대 규모의 군사 시설이다. 그러니 지금의 초지진은 초지돈대를 복원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무슨 까닭으로 초지돈대가 초지진으로 둔갑을 한 것일까.

1977년 10월 28일, 강화도 호국국방유적들의 복원 준공식에 참석해서 둘러보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출처 : 경향신문)

대통령의 특별 지시, 호국문화유적을 복원하라

197631일에 강화도를 방문한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옛 사적들의 보존이 부실함을 보고 보수할 것을 지시했다. 당시 정부는 호국문화유적의 복원과 정화를 특별히 강조했다.

이것은 단순히 유적을 보수하는 것에 그치는 게 아니었다. 새로운 건물을 짓고 기념비를 세우며 주변 환경을 정화하는 등 새로운 유적을 조성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 시기에 전국의 많은 유적들이 복원되었다. 이순신 장군과 관련된 유적들을 비롯하여 금산의 7백 의총 등을 비롯한 임진왜란 관련 유적과 유관순, 윤봉길 의사 등의 사당이 건립되었다.

또 전국의 주요 성곽들도 이때 보수했다. 강화도의 호국국방유적들(고려궁지, 강화성, 광성보, 신미양요 순국 무명용사비 등)도 이때 복원되었다.

호국국방유적들을 복원하고 정화한 데는 까닭이 있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미국 카터 행정부와의 관계가 매끄럽지 않았다.

주한미군 철수 문제 등이 대두되면서 우리 정부에서는 자주국방의 의지를 국민들에게 보여줄 필요성이 발생했다.

호국선열과 국방유적의 정화 정책은 우리 조상들의 국가수호의지를 국민들에게 알려 자주국방의 정신을 고취하도록 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

또한 이 정책은 박정희 대통령의 '자주국방' 의지를 간접적으로 부각시키는 효과도 가지고 있었다.

이때 강화도의 여러 유적들이 복원되었다. 초지진도 그중 하나였다. 지금은 문화재를 복원할 때 철저한 고증에 의해 작업을 하지만, 당시만 해도 그런 시절이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잘못 고쳐진 게 더러 있었다. 말하자면 졸속 행정과 빨리 빨리문화가 만든 작품이 바로 강화도 전적 유적지 복원 정화사업이었던 셈이다.

초지돈대를 초지진으로...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때 파괴된 초지진은 일제 강점기를 지나면서 빈 터만 남아 있었다. 원래는 나라 땅이었겠지만, 어느새 사유지로 편입이 되어 집이 들어섰고 농사를 짓는 밭이 되어 버렸다.

유적지 정화사업을 할 때 한정된 재정으로 초지진의 땅을 다 구입하기에는 무리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나마 남아있던 초지돈대를 복원하고 초지진으로 이름을 붙였던 것은 아니었을까.

'돈대'보다는 상위 계급인 ''을 붙이는 게 이웃해 있는 광성보나 덕진진과 격이 비슷해진다고 여겨서 그렇게 했을지도 모른다.

초지돈대는 바다 쪽으로 튀어나와 있는 언덕에 있다. 그러니 적 함선의 출몰을 맨 먼저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어찌 보면 초지돈대와 초지진은 한 몸이었다.

말하자면 척후병과 본대라고나 할까. 그 둘은 합동해서 적의 침입에 대응했을 것이다.

백여 명의 군사를 두고 있었던 초지진은 세월의 영욕 속에 흔적만 남아있었다. 그러나 초지돈대는 비록 무너지긴 했지만, 성벽의 잔재도 남아있었고 더구나 포탄의 상흔이 있는 소나무도 굳건히 돈대를 지키고 있었다.

그래서 초지진을 복원할 때 돈대를 새로 고쳐쌓고 초지진이라고 이름을 붙였던 것이리라.

그렇게 생각하고 보면 현재의 초지진이 이해가 된다. 비록 규모가 작아 당시를 상상하기에는 역부족이지만, 그래도 포탄을 맞은 흔적이 남아있는 소나무와 성벽을 보면서 과거의 치열했던 전투를 상상할 수 있다.

그나마도 남아있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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