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과 강화도의 질긴 인연
광해군과 강화도의 질긴 인연
  • 이광식 작가(내가면 거주)
  • 승인 2021.01.12 16:45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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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포리 정포마을에서 긴 유배생활

조선왕조 500년의 27군왕 중 가장 불행했던 왕은 누구였을까? 일단 쿠데타로 왕위에서 축출된 두 왕, 연산군과 광해군으로 압축할 수 있겠는데, 그렇다면 두 사람 중 누가 더 불행한 인생을 살았을까?

혹자는 30살의 젊은 나이로 적거지 교동도에서 숨을 거둔 연산을 더 불행한 왕으로 보겠지만, 예순여섯 천수를 누리고 유배지에서 죽은 광해가 어쩌면 훨씬 불행한 인생이었다고 볼 수 있다. 어떤 소설보다 더 파란만장한 그 인생행로를 더터보기로 하자.

서럽게 태어난 광해군

광해군은 출생부터가 서러웠다. 정비 소생인 적장자 연산과는 달리 후궁 소생인데다 둘째였다. 게다가 2살 때 생모를 잃었다. 애당초 왕이 될 신분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 서자 콤플렉스는 죽을 때까지 광해를 괴롭혔다.

조선은 원칙적으로 정실 소생인 적장자가 왕위를 계승한다. 물론 조선 왕이 모두 적장자 출신은 아니다. 오히려 예외가 훨씬 더 많다. 태조부터 순종까지 27임금 가운데 적장자 출신은 연산 포함, 문종·단종·인종·현종·순종 등 여섯에 불과하다. 능력보다는 정통성을 중시하는 적장자 우선 원칙은 왕위 계승에 따른 분란을 줄이는 역할을 하는 반면 부작용도 못지않았다.

광해의 아버지 선조 역시 서자 출신으로 어렵사리 왕위에 올랐다. 그럼에도 선조는 정비 소생의 아들이 없었고 후궁 공빈 김씨(恭嬪金氏) 사이에 난 임해군과 광해군을 두었다. 그런데 장자인 임해군은 인성에 문제가 있는 인물로, 방탕 포악하여 민가를 약탈하고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등 끊임없이 사고를 치는 바람에 일찌감치 열외가 되었다.

그렇다고 선조의 관심이 둘째 광해에게 오롯이 기울어진 것도 아니었다. 자신이 서자로 왕위에 올라 겪었던 숱한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였기에 끝까지 적장자를 포기할 수 없었다. 신료들의 성화에도 불구하고 세자 책봉을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다. 그러던 중 뜻하지 않게 임진왜란(1592)이 일어나는 바람에 선조는 북쪽으로 쫓겨 가는 신세가 되었고, 광해에게는 기회가 되었다.

광해군묘의 문인석.(출처=문화재청)

더 이상 세자 책봉을 미룰 수 없었던 선조는 평양에서 서둘러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고 분조(分朝;임시 조정)를 이끌어 난을 수습하게 했다. 광해는 그때 나이 17세였지만 난중의 분조를 이끌고 삼남지방으로 내려가, 군량을 모으고 의병을 모집하는 등 소임을 훌륭히 수행하여 조야의 명망을 한 몸에 지니게 되었다.

말하자면 전쟁 영웅으로 등극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아버지 선조의 눈 밖에 난 원인이 되었다. 아들의 눈부신 입신을 질투 어린 눈길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질투 끝판 왕이었다.

그러던 와중 선조 36(1606), 55살 늘그막에 선조는 중전 인목왕후에게서 적장자를 얻게 되었는데, 바로 영창대군이다. 선조는 영창을 매우 총애하고, 영창에게 왕위를 물려주어야 한다는 세력(소북파)들을 모아들였다. 광해에게는 심각한 위협이었고, 아버지 선조로부터 구박과 설움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심지어 선조는 승하 직전 세자 광해군이 문안을 아뢰면, “어째서 세자의 문안이라고 이르느냐. 너는 임시로 봉한 것이니 다시는 여기에 오지 말아라할 정도로 광해를 구박했다. 서자이기 때문에 받는 설움이었다.

선조는 또 수시로 느닷없이 선위 교시를 내리는 바람에 조정과 광해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물론 선위할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고 오로지 신하와 광해의 충성심을 떠보려는 수작이었다. 그럴 때마다 광해는 석고대죄하는 죄인처럼 엎드려 뜻을 거두기를 빌어야만 했다. 그러기를 무려 15차례나 했다.

그러나 시간은 광해의 편이었다. 이런 가운데 병이 위중한 선조가 1608년 광해군에게 선위 교서를 내렸던 것이다. 이윽고 선조가 죽자 인목대비가 언문교지를 내려 광해군은 33세로 15대 왕으로 즉위하게 되지만, 이는 또 다른 파란의 예고였다.

재위 기간보다 긴 유배생활

광해군 치하의 15년간 대륙에서는 명의 쇠퇴에 맞물린 후금의 발흥으로 격동기를 맞고 있었고, 내정에서는 폐모살제(廢母殺弟) 등 엄청난 난맥상들이 빚어졌지만,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이 글의 주제가 아니므로 반정 당시의 상황만 간략히 짚어보자.

반정 세력의 선봉은 능양군이었다. 선조의 손자로 광해군은 그에게 삼촌뻘이 된다. 능양군은 광해군에게 악연이 있었다. 억울한 역모사건에 얽힌 동생 능창군을 백방으로 구하려고 애썼지만 끝내 광해는 사약을 내렸다.

1623411(음력 312) , 능양군은 친병(親兵) 1,400여 명을 연서역(延曙驛)에 집결시켰다. 현재 역촌역과 구산역 사이에 있는 한영문 원룸텔 앞이다. 지금도 인조반정군의 첫 집결지를 기념해 연서역 터 표지석이 서 있다.

반정군은 시오릿길을 행군해 삼경(23~01)에 도성 북문 창의문(彰義門)에 다다라 빗장을 부수고 곧바로 창덕궁으로 내달았다. 도끼로 돈화문을 깨부수고 궁궐로 쳐들어간 선봉대는 별다른 저항 없이 궁궐을 접수함으로써 정변은 손쉽게 성공했다.

그날 밤 광해군의 행적은 어떠했던가? 광해는 야밤의 기습에 제대로 손써볼 겨를도 없이 북쪽 후원의 소나무 숲 속으로 숨어들어 사다리로 담을 넘어 대궐을 탈출했다. 젊은 내시에게 업힌 광해군은 한 궁인의 안내로 의관 안국신의 집에 숨어들었다.

광해는 안국신의 흰 의관을 빌려 쓰고 변장했지만, 안국신의 고변으로 반정군에게 체포되었다. 이로써 15년에 걸친 광해 치세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폐서인이 된 광해는 수레에 태워져 서궁(경운궁. 지금의 덕수궁)의 인목대비 앞으로 끌려나왔다. 선조의 비 인목대비는 광해보다 9살 연하지만 분명 어머니였다. 그러나 광해는 그 어머니가 낳은 아들, 곧 자기 동생을 죽였으며, 어머니를 폐서인하여 10년이나 서궁에 유폐시켰다.

그리고 지금은 폐주가 되어 그 어머니 앞에 꿇어 엎드린 것이다. 하늘 아래 둘도 없는 참으로 기막힌 모자 상봉이었다. 인목대비는 석어당(昔御堂) 앞에 무릎 꿇은 아들을 향해 '광해 36죄목'을 나열한 폐위 교지를 읽은 후 광해를 폐위했다.

폐주 광해와 폐비 유씨, 폐세자와 그 빈의 유배지는 강화로 결정되었다. 광해의 유배 행로는 추측컨대, 서대문을 통해 마포로 접어드는 길을 따라가 양화나루에서 한강을 건넜을 것으로 보인다. 이 일대의 한강은 서강(西江) 또는 서호(西湖)라고도 하며, 약 백 년 전 연산이 이곳을 거쳐 강화 교동으로 유배 갔던 행로이기도 하다.

서강을 건너 광해가 백 년 전 연산이 간 길을 따라 짚어갔을 노선은 김포, 통진, 강화도로 이어진다. 대체로 지금의 48번 국도를 따라갔을 것이다. 도성에서 그리 멀지는 않지만 뭍길, 물길을 따라 며칠을 가야 하는 험난한 여로였다.

교동의 광해군 유배지 옛 모습. 강화 교동 읍내리 270번지로, 1985년 세워진 비와 연산군 적거지라는 안내판.  비에는 연산군 잠저지라 되어 있지만, 광해군 유배지임이 확인되었다.
위 광해군 유배지의 현재 모습. 비도 안내판도 사라져버리고 우물 하나만 덩그러니 남았다. 역사에 대한 관계당국의 무심함에  오싹한 느낌이 든다

광해군의 강화도 인연은 이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이복동생 영창과 친형 임해군을 귀양 보낸 뒤 죽인 곳도 강화였고, 인조의 동생 능창군을 역모로 엮어 귀양 보내 죽인 곳도 역시 강화였다

그뿐 아니라, ‘궁류시(宮柳詩)’라는 시로 왕비 오라버니 유희분의 전횡을 비판한 조선조 최고의 문장가이자 강화도 시인이었던 권필(權韠;1569~1612)을 친국한 끝에 죽음으로 몰아넣기도 했다.

석주(石洲) 권필의 문재를 아낀 좌의정 이항복이 시 때문에 선비에게 형장을 치는 것은 성덕에 누를 끼치는 일이라며 한나절을 만류했고, 영의정 이덕형도 옆에서 힘써 거들었지만 광해는 끝내 굽히지 않았다.

왕의 친국에서 심한 곤장을 맞은 권필은 들것에 실려 해남으로의 유뱃길에 오른 첫날 밤, 동대문 밖 한 주막에서 따라온 친구들이 사준 술을 통음하고는 표표히 세상을 뜨고 말았다. 한 시대를 주름잡던 대시인의 허무한 죽음이었다. 그의 나이 겨우 마흔 셋이었다.

권필이 강화에 은거하며 후학들을 가르친 송해면 하도리에 있는 서당터에는 권필의 후손이 세운 석주권선생유허비(石州權先生遺墟碑)’가 남아 있다. 여담이지만, 결과적으로 권필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광해의 처남 유희분은 반정 후 처형되었다.

시 한 편 때문에 광해군에게 목숨을 잃은 권필의 유허비. 권필이 초당을 세웠던 곳인 강화군 송해면 하도리 초당 터에 권필의 후손이 세웠다.(사진/김향)

인연이란 원래 서로 얽히는 것인지, 그가 죽은 지 11년 뒤 인조반정으로 폐위되어 유배 온 광해는 석주 초당이 있는 곳의 지척에서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것도 보통 귀양살이가 아니라 탱자가시로 둘러싸인 집에 갇혀 사는 위리안치형이었다.

바깥으로는 구멍 하나만 뚫려 있어 산 자의 무덤이라 불리는 집이었다. 지하의 시인은 자기가 살던 곳으로 쫓겨 온 왕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이런 귀양살이 반년 만에 광해는 아들 부부와 아내 유씨를 모두 잃었다. 강화읍성 서문 근처에 위리안치 되었던 폐세자 이지(李祬)가 갇힌 지 두 달 후인 5, 인두와 가위로 무려 20미터나 되는 땅굴을 파 조선판 '쇼생크 탈출'을 기도했지만, 군졸에게 발각되어 잡히고 말았다.

나무에 올라가 망보던 폐세자빈은 놀란 나머지 나무에서 떨어져 혼절했다. 한 달 뒤 폐세자의 탈출 미수사건을 들은 인조는 사촌인 폐세자에게 사약을 내렸고, 이지는 아버지가 유배살이하는 강화읍성 동문 쪽을 향해 절을 올린 후 사약을 들이켰다.

그리고 사흘 후 폐세자빈 박씨는 목을 매어 자살했으며, 아들 부부를 잃은 폐비 유씨는 그해 10월 화병을 얻어 생을 마감했다. 일가의 비극적인 몰락이었다.

졸지에 아내와 아들 부부를 모두 잃고 홀로 남겨진 광해였지만, 고난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괄의 난과 병자호란 등 국내외 정세가 요동칠 때마다 교동으로 강화로 태안으로 또 제주도로 계속 유배지가 바뀌었으며, 늙은 몸을 유배길 위에서 혹사당했다.

18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한 광해는 특히 강화와 교동에서 오랜 기간을 보냈는데, 그중에서도 강화도 정포(井浦)에서 오래 살았다. 지금의 강화군 내가면 외포리 일대였던 정포는 당시 수군기지 정포진영이 있었는데, 그 기지 내 한 집에서 위리안치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외포리의 정포마을 어귀. 이 어름에서 광해가 유배살이를 했지만 흔적은 찾을 길 없다. 이 길을 따라 올라가면 정포보 군영지 터가 나온다. 지금 외포항이 정포항으로, 이름이 유래된 오랜 우물은 외포 사거리  '성안정' 식당 간판 아래로, 지금은 메꾸어졌다.

천여 명의 장졸들이 근무했던 기지인 만큼 유배인을 관리하기 편리했을 것이다. 지명까지 낳았던 이름난 우물은 지금은 묻혀버리고 그 위에 '성안정' 식당 간판이 서 있다.

늙은 나이에 외롭고 고달팠던 광해의 유배생활은 다음의 보고문으로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광해가 삼시 끼니에 물에 말은 밥을 한두 숟갈 뜨는 데 불과할 뿐이고 간혹 벽을 쓸면서 통곡하는데 기력이 쇠진하여 목소리도 잘 나오지 않는 지경입니다. 그리고 지난달 보름 이후로는 한 번도 빗질을 않고 옷도 벗지 않은 채 늘 말하기를 옛날 궁인들 가운데 반드시 생존한 자가 있을 것이니 그 중에 한 사람을 보내 달라. 생전에 한번 만나보는 것이 소원이다했습니다."

현 제주 구좌읍 행원리의 어등포(魚登浦)에 세워지 광해군 기착비.(사진=정영희)

'바닷가에서 죽고 싶다'

광해군이 마지막 유배지가 된 제주로 간 것은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남한산성에 나와 청 태종에게 항복했던 바로 1637년으로, 이미 환갑을 훌쩍 넘긴 62세의 노인이었다. 유배 생활은 벌써 15년차로, 왕으로서의 재위기간과 맞먹는 햇수였다.

광해가 교동에서 제주로 이배될 때 그를 태운 배는 사방이 휘장이 쳐져 있어 행선지를 알지 못하게 했다. 이윽고 배가 항구에 닿아 호행별장(護行別將) 이원로가 제주라고 알리자 광해가 깜짝 놀라며 크게 슬퍼했다고 한다. 이제 살아서는 한양 땅을 밟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테니 그의 낙담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겠다.

광해는 현 구좌읍 행원리의 어등포(魚登浦)에 상륙했다. 현재 그곳에는 광해 기착비가 서 있다. 마중 나온 제주목사가 "임금이 덕을 쌓지 않으면 주중적국(舟中敵國)이란 '사기(史記)'의 글을 아시지요?" 하니 눈물이 비 오듯 하였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그 동안 제주에 수많은 유배객들이 왔지만 왕으로서 귀양살이 온 사람은 광해가 유일했다.

조선왕조실록 인조 19710일자 기록에는 광해가 교동에서 제주로 유배지를 옮겨갈 때 지은 애조 어린 시가 실려 있는데, 주위의 듣는 이들이 모두 비감에 젖었다고 전한다.

부는 바람 뿌리는 비 성 머리에 자욱하고 風吹飛雨過城頭
후텁지근한 기운은 백척 누각을 이루었네 瘴氣薰陰百尺樓
검푸른 바다 거친 파도 속에 날은 이미 저물고 滄海怒濤來薄暮
푸른 산 가을빛은 써늘한 기운 머금었네 碧山愁色帶淸秋
가고픈 마음에 싫도록 왕손초를 보았건만 歸心厭見王孫草
나그네 어지러운 꿈에 놀라 깨니 제자주(제주)가 보이네 客夢頻驚帝子洲
고국의 존망은 소식조차 끊어지고 故國存亡消息斷
안개 자욱한 강 위 외로운 뱃전에 누웠노라 烟波江上臥孤舟

제주시 중앙로 국민은행 중앙점 자리에 광해군 적소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사진=정영희) 

제주 땅에서의 유배생활도 녹록치 않았다. 광해는 제주목 관아 인근 적거처에 위리안치 되었다. 방문은 봉하고 자물쇠가 채워졌으며, 속오군 30여 명이 교대로 지켰다. 광해의 적거처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제주시 중앙로 82번지에는 그가 이곳에서 유배생활을 했다는 표지석이 놓여 있다.

유배생활에 대한 기록이 많지 않으나 수발드는 나인들이 영감이라고 부르며 대놓고 구박하여 보는 이들을 분노케 했다는 말이 전한다. 하루는 광해가 참다못해 계집종에게 한 마디 타일렀지만, 돌아온 것은 계집종의 매몰찬 대꾸였다.

"영감이 이전에 임금 자리에 있을 때 무엇이 부족해 아랫사람들에게 음식까지 부탁해 김치판서, 잡채참판라는 말까지 만들어내게 했소? 영감이 임금 자리를 잃은 건 자업자득이지만 우리는 무슨 죄로 이 가시덩굴 안에 갇혀 있어야 한단 말이오?"

광해는 고개를 숙인 채 한마디 대꾸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자신을 감시하는 별장이 상방을 차지하고, 광해군을 하방에 두는 등의 모욕적 처사에도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 이미 모든 것을 달관한 듯, 체념한 듯했다.

그런 제주 유배생활도 오래 가지는 못했다. 귀양살이 총 18, 제주 땅에 유배된 지 4년 만인 1641(인조 19) 7166세 나이로 끈질긴 목숨을 내려놓았는데, 그의 마지막 말은 내가 죽으면 어머니(공빈 김씨) 무덤 발치에 묻어 달라는 것이었다.

조선왕조실록의 인조 19710일자 기록을 보면 광해군이 죽자 제주목사 이시방(李時昉)이 즉시 열쇠를 부수고문을 열고 들어가 예()로 염습했다는 기사가 나오며, 인조는 광해의 부고를 듣고 사흘간 조회를 멈추고 예조참의 채유후를 보내 장례를 치르게 했다고 한다.

광해는 그해 818일 시신으로 제주를 떠나 유언대로 경기도 양주 적석동에 있는 공빈 김씨 무덤 아래 묻혔다.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에 있는 광해군묘. 왼쪽이 광해군, 오른쪽이 그의 왕비였던 문성군부인 유씨의 묘. (사진=문화재청) 

일찌기 생모를 잃은 후 아버지에게도 사랑받지 못한 채 평생 서자 콤플렉스에 시달리며 불안과 불신에 찬 생애를 살았던 광해-. 

옛날 인목대비를 폐위하라는 대북파의 끈질긴 채근에 진저리치며 "하늘이여, 내게 무슨 죄가 있길 래 이다지도 혹독한 형벌을 내린단 말이오? 차라리 신발을 벗어버리듯 인간세상을 벗어나 팔을 내저으며 멀리 떠나 바닷가에서 여생을 마치고 싶노라" 독백처럼 내뱉었던 그의 말이 씨가 됐는지 제주 바닷가에서 그 굴곡진 생을 마감했다.

그가 죽은 시기인 음력 71일 무렵에 제주에 비가 자주 내리는데, 이를 '광해우'라 칭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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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정 2021-01-15 09:58:43
성안정이 그리 유서 깊은 식당일 줄이야...
한번 가봐야 할 듯...

김상용 2021-01-13 09:19:28
좋은 글 감사합니다.. 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