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쓰는 강화인물사’의 저자 이진환 선생에게 듣는다.
‘새로 쓰는 강화인물사’의 저자 이진환 선생에게 듣는다.
  • 인터넷 강화뉴스
  • 승인 2021.01.05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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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조선, 근,현대 시기 97명의 강화인물 수록
강도인물고, 강화인물사에 이어 25년만에 발간되어 자료적 가치 높아
꼼꼼한 현장 답사, 방대한 자료 수집으로 강화인물사의 오류 상당부분 잡아내

<새로 쓰는 강화인물사>는 어떤 책인가?

<새로 쓰는 강화인물사>1987년 강도인물고(江都人物考,홍재현), 1997년 강화인물사(江華人物史,강화문화원)에 이어 25여년 만에 새롭게 출간된 책이다.

강화 역사를 기록한 인물, 고려, 조선시대, 일제 강점기와 현대에 이르기까지 총 97명의 인물을 다루고 있다. 특히 강화사를 집필한 홍재현, 매립, 간척을 주도한 강화유수 민진원, 임진왜란 때 명나라 지휘관이었던 이여송의 성주 이씨 가문, 한국문학사에 우뚝한 정철, 권필, 이안눌, 김만중, 하곡 정제두의 후손, 강화학파인 전주이씨 덕천군파의 후손 등이 눈에 띈다. 저자는 이들의 관향과 선대의 가계를 정밀 조사한 후 가문별로 정리함으로써 각 인물의 관계가 어떠했는지 잘 보여준다. 또한 각 인물의 영정이나 사진, 관련 업적이나 유적 자료를 삽입하고 있어 보다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새로 쓰는 강화인물사>3년 동안 저자가 자료를 찾고자 강화는 물론 전국 곳곳을 누비고 다닌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관계된 문중과 다양한 사람을 만나 인터뷰하고, 수많은 자료들과 족보, 가승을 꼼꼼하게 비교 분석하여 그동안 잘못 알려진 오류들을 상당부분 바로잡고 있다 그동안 발간된 인물서가 앞 자료를 그대로 답습함으로써 오류를 기정사실화한 부분이 적지 않았으나 <새로 쓰는 강화인물사>는 자료 조사와 고증에 충실하여 향후 강화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지닌다.

저 자 : 해운 이진환

약 력 : 선원면 출생, 한양대학교 생물학과 졸, KIST, 상명대학교 교수, 한국조류학회, 환경생물학회 회장 역임. 2016년<교동도의 역사와 문화산책>출간

출판 : 정행사   48,000

구 입 : 강화뉴스 (032 - 932 - 0222 , 010 - 5232 - 0558)

새로 쓰는 강화인물사 겉표지
새로 쓰는 강화인물사 겉표지

<새로 쓰는 강화 인물사>에 대해 간단히 소개해주십시오.

고려시대 인물부터 다루면 지루해 할까 봐 거꾸로 현존하는 사람들을 앞 쪽에 실었습니다. 현재 생존해계신 분으로 성공회 김성수 주교님을 다루고 있습니다.

강화 역사를 기록한 분 중에 곡촌 홍재현 선생이 있습니다. 하점면 태생으로 부면장을 지낸 한학자입니다. 이 분이 1976년에 강화사를 집필하고, 1987년에 강도인물고(江都人物考)를 썼습니다. 그걸 바탕으로 1997년 강화문화원에서 강화인물사(江華人物史)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강도인물고를 거의 구할 수 없습니다. <새로 쓰는 강화 인물사>는 강도인물고와 강화인물사를 잇는 책입니다.

곡촌 선생이 강화사를 쓸 때는 병와 이형상이 쓴 강화 최초의 역사지지인 강도지(江都誌)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책이 1975년에 알려집니다. 당시 김재수 강화문화원장이 이형상 후손에게 그 책을 보여 달라고 사정했지만 거절당했다고 합니다.

결국 곡촌 선생이 쓴 강화사는 1932년에 동관 박헌용이 쓴 속수증보강도지를 기본으로 했습니다. 동관 박헌용의 묘소는 내가면 황청리 덕산에 있어요. 동관의 외아들이 한국 10대 서예가 중의 한명인 동정 박세림입니다. 그 선영에 함께 모시져 있더군요. 처음에는 수풀이 우거져 잘 몰랐는데, 변호사인 증손과 같이 산소에 가서 벌초했습니다. 동정 박세림은 아버지인 동관의 호를 차용하여 ()’를 써서 우관(又觀)이라고 하기도 했답니다.

저자 해운 이진환 선생
저자 해운 이진환 선생

속수증보강도지를 쓴 박헌용 선생은 계명의숙 설립, 독립운동 참여 등 강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로 당시 강화 지식사회 네트워크를 파악하는데 핵심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동관 박헌용은 보성전문학교 법률학과를 나왔고, 계명의숙 뿐만 아니라 석모도에 육영의숙을 세웠습니다. 속수증보강도지는 당시 최고의 인쇄기술과 최고의 칼러를 입혀 최고의 책을 만들었습니다. 이런 책을 만들려니 당연히 많은 돈이 필요하죠. 그래서 박헌용 선생이 강화향교의 전교가 됩니다. 그 덕분에 강화향교에서 속수증보강도지 간행할 때 상당한 재정을 부담했습니다. 또 속수증보강도지를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내가면에 혁신회를 만들어서 계몽운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동휘 선생이 계몽운동가라고 하지만 박헌용 선생도 그에 못지않은 계몽운동가인 셈이죠.

그런데 덕산 선영에 비석이 하나도 없어요. 그래서 후손들에게 비석을 세우는게 어떠냐고 말했더니 묘터가 제비날개 혈이랍니다. 그 위에 비석을 올리면 제비가 날지 못한다고 하여 비석을 안세웠다는 겁니다. 아쉬움이 있지요. 강화에서 꼭 기억해야할 유학자인데 국회의원을 지낸 박용호씨도 문중 후손이라니 나중에 후손들과 잘 이야기해서 비석을 세우면 좋겠습니다.

곡촌 선생이 1976년 강화사를 쓸 때 검여 유희강 선생의 글씨를 받았어요. 이당 김은호 화백 그림도 받고, 그 만큼 강화의 선대들은 사람을 알아보고 교유했던 것입니다. 지금은 강화의 격이 예전과 많이 다른 듯 해서 안타깝습니다.

 

거의 600여쪽에 달하는데, 이처럼 방대한 작업을 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습니까?

제 취미중 하나가 서지(書誌)입니다. 대학생 때부터 강화도 관련 책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석,박사 과정을 마치고, 직장에 다니는 동안 너무 바빠서 책을 사기는 했어도 읽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1986년도에 전국자연생태계조사를 하면서 볼음도, 아차도, 교동도를 조사했습니다. 그때 교동도에 가보니 넒은 평야가 있고, 섬이 참 멋지구나, 언젠가는 다시 한 번 와봐야지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 후 재경강화교우회에서 교동도를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설명을 들으면서 문득 교동의 문화와 역사를 정리해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년 퇴임하고 고향인 강화로 돌아갈 때 귀거래사는 아니어도 고향 분들에게 인사라도 드리자는 차원에서 쓴 게 <교동도의 역사와 문화산책>입니다.

이 책을 쓰다보니 곁가지가 나오고, 인물 쪽으로 강화도까지 미치게 된 겁니다. 그 후 교동 유림이나 향교에서 불러주고, 또 강화노인대학에서 4년 정도 강의했습니다. 강화문화원에서 인문학 특강을 했구요. 이렇게 지평이 자꾸 넓어진 것이죠. 특강하고, 책을 쓰면서 알게 된 인물들을 본격적으로 조사해서 엮은 것이 바로 <새로 쓰는 강화인물사>입니다.

 

이 책을 쓰면서 어려웠던 점은 없었습니까?

가장 어려웠던 점은 인물의 선정기준이었습니다. 제가 기관에서 돈을 지원받아 책을 썼다면 굉장히 어려웠겠죠. 기준이 뭐냐, 이런 인물이 적합하냐 등등 힘들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 책은 사찬(私撰)이거든요. 저자가 기준을 정하고 쓰는 것이기 때문에 누가 뭐라 할 수는 없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정한 기준을 세워 따져보니 140~150여 명이 나왔습니다. 그중에서 100명을 목표로 줄이고, 최종적으로 97명을 선정했습니다. 어렵더라구요.

고려시대의 인물을 다룰 때 최우는 일개 섬이었던 강화를 일약 고려 수도로 만든 사람이기에 다뤘고, 삼별초 항쟁의 중심 인물인 배중손, 김통정도 뽑았죠. 고려는 두 인물을 역적이라고 지워버렸지만 지금은 다르게 평가합니다. 김통정은 교동 읍내리 사람이고, 배중손은 길상면 초지리 사람입니다. 그런데 전라남도 진도에 가보니 배중손을 진도사람이라 주장합니다. 결국 누가 더 많이 관심 갖고, 쓰고, 홍보하느냐가 관건입니다. 결정적인 자료가 나오지 않는 한 말입니다.

내가면 외포리에 있는 삼별초항몽유허비가 있지만 매우 빈약합니다. 당시 2,000여 척 정도가 집결했는데, 외포리 포구에서 황청리, 심지어 승천포까지 모였습니다. 역사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곳인데, 아무도 모르는 구석에 있습니다.

진도나 제주도는 항몽유적지를 잘 조성해놓고 있는데 강화는 관심도 없어요. 지금이라도 망월평야가 있는 구하리 앞쪽에 제대로 조성해서 삼별초 항쟁을 기려야 합니다.

 

지난 11월 하순 배준영 의원실에서 회의할 때 제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강화군의 관광자원은 굉장한 잠재력이 있다. 강화대교를 건널 때 사람들은 뭘 보러올까 정치가는 그런 점을 한번쯤 생각해보지 않겠는가? 나는 사람들이 단순히 진달래 축제, 고인돌, 전등사를 보기 위해, 새우젓을 사기위해 온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근본적으로 고려를 보러 온다. 강화의 유구한 역사가 있고 그 바탕 위에서 관광도 하고, 쉬다가 간다. 강화는 엄연히 39년간 고려의 수도였다. 대한민국에서 고려를 알 수 있는 곳은 강화도 이외에는 없다. 그런데 너무할 정도로 관리가 안되고 있다. 고려천도공원이 어디 있는 줄 아는가?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거기 가면 천도문이랍시고 마치 오막살이집 대문처럼, 장난감도 아니고 발길로 걷어차면 쓰러질 것 같은 걸 지어놓았다. 고종 사적비 방향도 틀렸고, 팔만대장경 기념비도 팔만대장경판을 만들어서 그 위에다가 글을 써야지 뜬금없이 광개토왕대왕비가 뭐며, 거란이며 몽골 구분도 못하는가?

이렇게 맥락이 연결이 안되고, 뒤죽박죽이면 강화에서 뭘 배우고 느낄 수 있겠는가? 관광활성화를 위해서라도 저변에 흐르는 큰 방향, 고려라는 것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진달래를 보든 하다못해 새우젓을 사더라도 의미를 담아 갈 수 있다.“고 이야기했어요.

 

아쉬움을 많이 토로하셨는데, 특별히 더 아쉽게 생각하시는 인물이 있으신지요?

서포 김만중입니다. 사씨남정기, 구운몽을 지은 분인데, 이분이 강화에서 태어났습니다. 병자호란 때 아버지가 선원 김상용과 남문 위에서 순절하고, 그 어머니가 가까스로 피난선을 부여잡고, 타자마자 배 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아명이 선생(船生) 뱃동이입니다. 마지막은 남해군 노도에 유배가서 죽습니다. 그래서 남해군에 가면 유배문학관을 잘 지었고, 노도에도 유허지를 잘 해놓고 있습니다.

또 통탄할 일은 서포 김만중은 사계 김장생의 후손으로 세거지가 대전 부근입니다. 뿌리가 그쪽이라고 대전광역시는 2011년부터 구운몽 문학벨트 거점도시 조성 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조례도 만들고 문학비도 세우고, 다양한 행사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강화는 서포 김만중이 강화 태생이라는 걸 아는 사람도 없고, 기리는 일은 꿈도 안꿉니다. 송강 정철은 또 어떻습니까? 강화에서 생을 마감한 분인데 안내판 하나 없어요. 우리나라 사람 중에 서포나 송강을 모르는 이가 없지만 정작 강화에서 서포나 송강의 흔적을 찾아볼 길이 없습니다.

동악 이안눌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훌륭한 강화유수 중 한분으로 조선 최고의 문필가이기도 합니다. 나들길을 걷다보면 화남 고재형 시만 잔뜩 써놨는데, 사람들이 강화에는 시인이 화남 고재형만 있는 줄 압니다. 이안눌의 휼민시나 현윤관같은 좋은 시를 알릴 생각은 왜 안하는지 답답하죠. 석주 권필도 웬만한 사람이면 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 제가 이 책 쓰면서 화남 고재형의 생몰연대를 다 고쳤습니다. 5년 차이가 나는데, 그동안 베껴 쓰고 베껴 쓰다 보니 잘못된 사실이 지금까지 이어져 온 것이죠.

그리고 다산 정약용에 버금가는 실학자이신 강화유수 서유구, 임원경제지를 쓰신 분인데 제대로 조명하지 못했던 점이 아쉽기도 합니다.

저자 해운 이진환 선생
저자 해운 이진환 선생

선생님이 애쓰신 공력이 많이 느껴집니다. 특별히 더 강조하고 계신 분이 있습니까?

강화군에는 하드웨어, 즉 외양은 어느정도 갖추었다고 보지만 내면이 안갖추어져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제가 맨 마지막 페이지에 강화의 혼맥관계, 하곡 정제두 선생의 학맥을 도표로 정리해두었는데 이걸 보면 당시 강화의 주류사회가 어떻게 관계를 맺고, 엮이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이것이 강화의 멘탈, 정신세계를 형성하는 바탕이겠지요.

강화의 정신세계로 하곡 정제두가 이야기하는 지행합일을 드러낼 시기가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강화의 정신, 내면적 가치를 구축할 필요가 있습니다. 강화학파를 더 조명해야죠.

또 단암 민진원이 있습니다. 이 분은 숙종 때 강화유수를 지내면서 가릉포와 선두포를 연결하여 매립해서 농토를 만들고, 강화읍성도 새로 쌓고, 목장 혁파, 강화 민심 교화 등을 위해 노력한 사람입니다. 강화사람들이 처음에는 다 힘들어했지만 나중에는 백년에 걸쳐 할 일을 2년 만에 해냈다.’고 칭송합니다. 지금 강화에는 민진원을 기리는 비석이 4개나 있습니다.

강도지를 비롯한 역사지리지는 물론 민진원 역시 강화사람의 습속을 뭉치지 못하고, 남 탓하고, 다툼을 좋아하며 소장을 많이 낸다.’라고 부정적으로 평가하면서 이를 교화시키려고 마을을 작은 단위로 묶어서 협력하도록 했습니다. 이처럼 잘먹고 잘살게 하고, 정신세계도 바꾸려고 한 민진원은 강화가 꼭 기억해야할 인물이죠.

 

이 책을 쓰신 까닭이 무엇인가요?

이 책을 쓴 이유는 두가지입니다. 첫째는 강화사람이면 최소한도 이정도 인물은 알고 있어야 한다는 교양적인 목적이고, 강화군이 정책적으로 관광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는 인물을 다루자는 것이 두 번째입니다.

송강 정철, 석주 권필 모두 관광자원의 가치가 뛰어난 인물입니다. 이규보도 그렇구요. 송해면이 송강 때문에 이름지어졌다는 말은 제발 하지 말아야죠. 할아버지가 살던 담양에서 공부할 때 그 앞에 흐르는 강이 죽록천이며, 다른 이름이 송강이라서 호를 송강으로 지은 것인데, 강화군청의 모 공무원이 송해면을 그렇게 설명하니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공무원이 모든 걸 다 알 수는 없습니다. 정책을 수립하고, 예산을 집행하는 역할을 하고, 머리는 전문가한테 빌리는 겁니다. 전문가한테 아이디어를 사는 겁니다. 또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모으면 좋은 아이디어가 얼마든지 나옵니다. 얼마 전에 강화도의 심볼로 뭘 하면 좋겠느냐고 묻길래 강화에서 큰 돈을 내놓고 아이디어를 전국적으로 공모하라고 했습니다.

강화사람 몇이 모여 횃불을 내세워 성공했나? 지금은 다 없어지지 않았습니까? 공모하면 얼마든지 참신한 아이디어가 나올 수 있다. 공무원의 역할이 바로 그런 겁니다. 전문가 의견을 구하고, 참신한 아이디어가 나올 수 있도록 정책을 마련해야죠.

또 잘못 기록된 것은 얼른 고쳐야 합니다. 지적을 하면 변명하기보다 빨리 빨리 수용해서 고쳐야 강화의 역사문화자산이 욕을 안먹습니다. 제가 <강화문화>에 글을 쓸 때 예전에는 크로스체크를 안했지만 지금은 합니다. 딴 사람이 읽어주고 지적을 해주면 나한테 도움이 많이 됩니다. 일례로 용흥궁에 있는 3.1운동 기념비와 명판에 적힌 독립운동가들 명단 중 강화와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 꽤 있습니다. 게다가 교동도의 고목근현, 충렬사, 고려궁지, 천도공원, 공적비 등 오탈자나 잘못 오기된 부분이 꽤 있는데 고집 부릴 게 아니라 빨리 고쳐야 합니다.

 

앞으로의 계획을 말씀해주십시오.

다루지 못한 인물이 40여명 가량 됩니다. 왜 그분들을 다 싣지 못했는가하면 원래 이 책은 제가 칠순을 맞아 작년 1130일 출간했습니다. 시간을 정해놓으니 초고는 써놓고도 마지막으로 현장점검을 하지 못해서 뺀 것입니다. 나중에 속()강화인물사 그런 걸 하면 좋겠네요. 출판기념회도 125일 예정하고 초대장까지 발송했지만, 1124일 코로나 19 확진자가 일일 380명에서 580명으로 증가하면서 다 취소하고 말았습니다.

이 책은 강화를 다룬 로컬성격의 책이기 때문에 강화사람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팔리지 않는 책입니다. 가격도 48,000원으로 꽤 비쌉니다. 제가 기증하고, 또 몇몇 관심있는 분들이 구입했지만 아무래도 강화 사람들이 좀 더 관심을 가져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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