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만세장터와 동락천, 원형 복원 필요
강화 만세장터와 동락천, 원형 복원 필요
  • 한상운(향토사학자)
  • 승인 2020.12.11 10:1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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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만세장터

3,1절하면 유관순과 천안 아우내장터가 생각난다고들 한다. 하지만 330일 개최된 아우내 장터에는 3천명이 모였지만 312일 강화장날에는 1만 명이 모였다. 보름이나 먼저 열렸고 훨씬 많이 모였는데도 국민들 태반은 이 사실을 모른다.

천안은 16살인 이화학당 2년생 유관순과 아버지 유중권, 조병옥(후일 대통령 후보)의 부친 조만원 등이 주동했고 일경이 발포하여 16명이 피살되고 30여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강화는 시위대장 유봉진을 필두로 혈기 왕성한 21살의 강화기독청년회장 조봉암(후일 대통령 후보) 등이 참여했는데 비폭력 시위로 전개됐고 전국에서 3번째로 규모가 컸다.

천안은 유관순기념관과 아우내 독립만세운동기념공원을 조성해 전국에 널리 알려졌다. 반면, 강화는 기념관은커녕 만세장터의 흔적마저 없다. 웃장판(현 중앙시장 B)에 있던 기념비조차도 견자산으로 옮겼다가 다시 김상용선생 비각 옆으로 옮겼다가 또 다시 용흥궁공원으로 옮겨 다녔다. 이것이 강화3,1독립만세 운동사의 현 주소다.

용흥궁 공원의 3.1독립만세운동 기념비는 역사의식이 결여된 한 단면이다. 1907년 조선의 국권이 상실되자 격분한 강화진위대장 성재 이동휘(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와 의병장 이능권 등은 군복을 벗어 던지고 웃장터에 집결, 전국에 요원의 불길을 당겼는데 이곳이 정미의병의 발상지다.

웃장터는 고려의 강화천도 시기에는 인구 30만이 이 저잣거리에서 각종 상거래를 한 나라장터였고, 6.25 때는 장날이면 전국에서 월남하신 분들이 모여 눈물로 애환을 나누던 만남의 광장이었다. 4.19혁명 때는 강화 중고와 여중고생 1.000여명이 독재에 항거했던 민주 광장이었다. 소창보다 더 유명했던 교과서에 기록된 강화특산품인 강화인조장이 섰던 장마당이기도 했다.

1979년 유신정권 말 재래시장 현대화 명목으로 3.1조선독립만세운동 장터 중앙에, 육중한 규모의 중앙시장 A/B 2동을 강화의 유지들이 대거 참여하여 만들었으나 준공 후 초장부터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전국에 소문났던 강화장은 40여년이 지난 지금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가고 있다. 역사와 문화가 유무형의 소중한 자산이라는 생각 속에 새로운 발상이 필요하다.

세계 여러 국가들과 역사를 공유한 소중한 자산을 간직한 강화에 서울 황학동의 골동품이나 프랑스 생두앙, 뉴욕의 헬스, 도쿄 요요기 벼룩시장 같은 보고, 먹고, 놀 꺼리를 조성하면 강화읍의 숨통은 물론 강화군민 전체가 신바람 나는 자긍심으로 활성화 될 것이다.

강화군이 예산이 없으면 인천시나 중앙정부에 당당히 요구하면 된다. 안 해서 그렇지 강화의 찬란한 역사문화를 소개하면 없는 예산 항목도 만들 수 있다. 그만큼 강화는 대단한 곳이다.

위) 1977년 복개 전 동락천 모습, 아래) 현재 모습

동락천

한반도는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대다수 물길이 동에서 서로 흐르는 지형인데 간혹 서에서 동으로 물이 흐르는 지역은 예외 없이 왕도였다.

조선조의 수도인 한양도 서촌인 북악산의 백운동천과 인왕산에서 흐르는 물이 청계천에 합류하여 동 쪽인 한양대 앞 살곶이에서 한강에 합류한다.

백제 수도인 부여도 서쪽인 칠갑산에서 발원한 지천천이 부여를 지나 백마강에 합류한다. 신라의 수도인 경주시를 흐르는 형산강도 서면 도리 인내산에서 발원하여 동해로 흐른다.

임시수도였던 부산도 서쪽 구덕산에서 발원한 보수천이 부산 시내를 거처 동남쪽의 자갈치로 흐른다.

강화8경인 적석낙조의 고려산 국정(國淨)에서 발원한 동락천은 송악산(북산의 원래 이름)아래 강화읍을 지나 동쪽인 갑곳이에서 염하강에 합류하는 강화의 대표적인 생명수 젖줄이다.

1900년 동락천 돌다리 아래에 잠두(.중앙)교회를 세우고, 같은 해 백범 김구선생도 강화읍 돌다리 아래 남문통 안에서 최초로 교육사업을 한 기록들도 있다.

이 돌다리는 궁궐에 사시던 최주환 진사가 사비로 세운 동락교로 강화초교에서 합일학교 가는 길목에 위치해 동락천을 복원하면 동락교 이름과 함께 최진사 함자도 있을 법하다.

동락천을 개복 후 청계천의 광통교 같은 동락교를 생각하면 진짜 강도(江都)의 옛 정취가 물씬 넘칠 것이다.

건설우선의 국가 정책이 자연의 소중함을 인식한 후 서울 청계천과 수원천과 부천의 심곡천을 원래대로 개복하고 나니 시민들의 삶의 질과 문화의 척도가 점차 향상됐다고 한다.

역사의 고도(古都)인 강화군도 자연환경 생태계의 보고인 동락천을 속히 개복할 것을 권면한다.

강화는 1986 아세안경기 때 30년 전통의 마리산 성화 채화를 경주에 빼앗기기 전 까지는 인구도 많고 잘들 살았다. 강화읍 아래웃 시장이 부족해 새시장까지 생겨나 늘 북적북적하여 외지에서 강화사람들 부러움을 샀는데 요즘은 해 만 지면 강화읍은 적막강산으로 변한지 오래 됐다.

강화읍의 생명수 동락천을 원래대로 개복해 물과 숲을 조성한다면 강화 발전의 새로운 활력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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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태 2020-12-12 17:04:58
전폭적으로 찬성합니다.
강화읍 신문리 남문안 댕댕이고갯 마루 높은 곳(꽃집)에서 유•초•중 어린시절 보내면서, 동락천에서 물고기 잡으며 놀던 시절이 많이 추억으로 떠오릅니다.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때 6.25동란으로 보릿고개로 어려운 시절 동락천변 신작로 흙길에서 누님이 집에서 만든 사탕을 팔거나 강화읍 만세장터 웃시장 좌측 입구 전봇대 아래서 라이터 매매•수리 좌판 등으로 생계를 돕거나 하던 중, 북한군이 점령한 9월(?) 중 첫 장날 아군 폭격기 몇 대가 저공 비행하면서 갑자기 기총소사를 쏟아부어 저희 가족들이 뿔뿔이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니, 누님은 등에서 약간의 피가나 경상이지만, 저는 오른 팔에 파편 두 개가 박혀서 퉁퉁 부어올라, 다행히도 민간요법으로 기르던 생닭살을 붙여서 독을 빼 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