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섬재발견, 마을이야기] 사라진 포구와 남아있는 사람들
[강화섬재발견, 마을이야기] 사라진 포구와 남아있는 사람들
  • 김시완 기자
  • 승인 2020.11.25 17:02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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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사면 철산리 편

사라진 포구, 산이포

우리나라에서 아마도 북한과 가장 가까운 마을이 강화도 양사면 철산리가 아닐까 싶다. 조강(祖江)을 사이에 두고 철산리 산이포와 북녘 땅 해창포는 직선거리로 1.8에 불과하다.

철산리는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 서해로 흘러 들어가는 위치에 있으며 대부분 평지로 이뤄져 있다. 자연마을로는 산이포, 진말, 철곶이 있다.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조선 시대에 철곶보가 있던 철곶(鐵串)과 포구마을인 산이포(山伊浦)를 합해 철곶의 철()과 산이포의 산()을 따서 철산리라 했다고 한다.

산이포(山伊浦)는 철산리 동남쪽 바닷가에 있던 포구마을이었다. 예전에 포촌동이라 불리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산이포로 변경되었다. 60년대까지 사람들이 살았는데 70년대 들어 철조망이 쳐졌고 주민들은 강제 이주 당했다.

산이포는 6.25 이전까지 700여 가구가 모여 살았고, 교역의 중심지로서 강화의 가장 번화한 항구 마을로 알려져 있었다. 서울과 북한을 오가던 배들의 정박지이기도 하고, 삼남 지방에서 생산되는 곡물을 비롯한 다양한 물자가 한강을 따라 서울로, 예성강을 따라 개성으로 올라갈 때 물때를 기다리며 머물던 포구였다.

번성했던 산이포 추정모습

100여 척의 선박이 정박했고 오일장이 열리면 황해도 연백 사람들까지 모일 만큼 수많은 선원으로 북적였다고 한다. 온갖 상점과 주막이 성황을 이뤘으며 주거지와 상점이 성냥갑 모양으로 붙어있고 한 사람이 겨우 지나다닐 만큼 골목이 좁고 미로 같았다고 한다.

 

빼앗긴 땅, 대답 없는 보상과 대책

철산리 마을 초입에 들어서면서 깜작 놀랐다. 군부대 검문소가 있어서다. 검문소 바로 앞 10m 거리에 이장님 집이 있고, 100m도 안 되는 거리에 대부분의 마을 주민들 집이 자리 잡고 있다. 검문소가 코앞에 있는데 마을은 평안할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철산리 마을 입구. 도로 끝에 해병대 초소가 있다

산이포에서 살다가 철산리로 강제 이주해 오신 마을 어르신 김종범 할아버지와 아내인 신경애 할머니를 만나 산이포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여기는 살기가 너무 힘들어요. 검문소 있지, 집도 맘대로 못 짓지, 발전할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철조망에 들어간 땅값도 안 주지, 작물 값도 안 주지, 국방부에서 2018년 정도에 와서 배상해 주겠다고 자료조사 다 해 갔는데 6개월 안에 보상해 주겠다고 해놓고 1년 지나고 2년이 지나도 배상을 안 해주고 있어요. 이게 주민을 농락한 것밖에 더 돼요?”

신영애 할머니와 김종범 할아버지

철산리 살이에 대한 안부를 여쭙자 김종범 어르신의 역정이 먼저 들려온다. 사연에 대해 자세히 물었다.

산이포구는 강화 제일 포구였어요. 그때가 왜정시대(일제시대)였는데 나는 초등학교 다닐 때였어요. 여기에 한 700호 살았는데 모두 조그맣게 집을 짓고 살았어요. 다들 가난하고 고만고만한 살림살이였지요. 산 중턱에서 내려다보면 지붕이 조그맣게 다닥다닥 붙어있었어요. 마치 성냥갑 같아요.

그래도 이곳에 장마당(지금의 상설 시장)이 한 500평 정도 있었는데 여기에 소장도 서고, 도축장도 있었어요. 덕하리 사람들이 나무를 해다가 팔러 오면 그래도 돈이 있는 사람들은 나무를 때기도 했지만, 우리 같은 가난한 집은 겨울에 나무때기도 힘들었지요.

어릴 적이라 장이 서면 사탕도 사서 먹고 다니면서 놀았지요. 특히 여기는 돌담을 쌓아서 그 돌담이 골목을 이루었어요. 골목길이 하도 좁아서 사람이 한 번 들어가면 길 찾기가 엄청 어려웠어요. 미로같이 700호 가까이 골목이 이어져 있다고 생각해 봐요. 쉽게 나오기가 힘들었지요. 산이포는 포구라 워낙에 배들이 많이 왔다 갔다 하니까 철산리에 비해 먹고사는 것이 좀 나았어요. 같은 리에 있는데도 철산리와 산이포구는 여러 가지로 생활 모습이 달랐고요.

마을 사이로 멀리 산이포가 보인다
마을 사이로 멀리 산이포가 보인다

산이포구 쪽은 6.25가 나서도 포구가 유지되었는데 1.4 후퇴 때, 터키군이 유엔군으로 주둔하다가 후퇴하면서 산이포구의 배를 모두 불로 태워버리고 갔어요. 그러니 배 주인들이 살길이 없어서 인천이나 외지로 떠나게 되는 경우가 많았지요.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남아서 살아야 하는 사람이 한 300호가 살았고요.

그러다 전쟁이 계속되면서 피난 가는 사람들이 생기고 나중에는 집들도 자꾸 헐리면서 빈집이 많이 생겼어요. 이것을 개성 사람들이 벽을 헐어서 집을 개조해서 살았지요. 등기가 안 났기 때문에 손만 봐서 살았던 거예요. 그러니 집임자가 따로 없었지. 그러다가 내가 젊었을 때, 개발위원장을 하면서 이런 집들을 죄다 등기를 받아서 등록을 해줬어요. 그러니까 번듯이 지번이 있고 등기가 된 개인 소유의 땅이 된 거지요.

그런데 70년대에 군인들이 들어오면서 해병사단이 막 땅을 밀고 철망을 치면서 살고 있던 사람들을 내쫓았어요. 땅 주인 허락도 없이 자기들 마음대로 땅을 사용한 거예요. 게다가 농사 못 짓는 부분에 대해 보상을 해 준다고 해놓고 보상은커녕 전화도 안 받고 있어요. 아마 국가에서 돈을 받았으니까 6개월 안에 보상해 주겠다는 이야기가 나왔을 텐데. 이게 지난 2018년 여름이었어요. 그런데 지금까지도 아무 소식이 없는 거예요.

우리가 무슨 힘이 있나요. 말도 못 하고 그냥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거지요. 철조망 너머에 우리 땅이 있죠, 군부대가 높은 지대의 땅을 밀어서 공터를 만들어 놓고 관리도 안 해요. 등기가 나 있는 개인 땅인데도 지들 맘대로 쓰는 거죠. 밭도 못 해 먹게 하고 집도 못 짓게 하니까 답답하고 울화통 터지는 상황이죠.

철산리 마을 전경
철산리 마을 전경

마을에 개발할 땅도 없고, 집하나 지으려 해도 해병대 사령부 허가를 받아야 해요. 집을 못 짓게 하니 마을이 번창이 안 되잖아요. 덕하리는 그래도 집을 짓고 하니까 여기보다는 발전을 하고 있어요. 덕하리는 천주교에서 수녀들이 들어와서 꽃동네 같은 요양시설도 몇 만 평 짓고 하니까 그게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치는지 몰라요.

철산리는 내 또래 80 넘은 사람이 이제 세 명밖에 없어요. 남아있는 40가구 정도의 마을 사람들과 그럭저럭 살고 있어요. 산 넘어에 철곶이 있는데 거기는 18호 정도 살고 있고요. 대부분 빈집이 많아요. 농사짓기도 나이가 들어서 힘들고 그냥 자식들 한 번씩 오면 그 낙으로 살지요. 포구 철조망 때려 부수고 집 지으라고 하면 얼마나 좋겠어요.”

건강이 좋지 않아 힘들어 하시면서도 산이포구 이야기와 마을살이를 조목조목 이야기하시는 모습에서 그동안 쌓여왔을 노인의 답답함이 전해졌다. 분단이라는 상황 속에서 겪었을 고초와 자기 집과 땅을 두고 내쫒긴 마음이 얼마나 답답하고 억울했을지 가 느껴졌다.

 

강제 이주와 선전용 집, 그리고 대남대북 방송

철산리 주민들은 결혼해서 들어온 여성들을 포함해도 대부분 30년 이상 터를 다지며 살아온 토착민 중심 마을이다. 그래서인지 옆집 숟가락이 몇 개인지 까지 알 만큼 허물없이 지내는 곳이지만, 그에 따른 애환 또한 많다고 한다.

장석홍 철산리 전이장

장석홍님은 일찍 인천으로 공부하러 나갔다가 20대 초반에 결혼하면서 고향에 돌아와 정착했다. 현재 농업을 생업으로 하며 젊은 나이에 마을 이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장석홍님과 현재 마을 부녀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부인 이명숙님을 만나 마을이야기를 들어보았다.

학교 다닐 때 외엔 마을을 떠나 본 적이 없죠. 다른 곳에서 살아 보려고 부모님께 방 얻어 달라고 강화에 들어왔다가 잡혀서 일찍 결혼하고, 고향에서 터를 잡고 살기 시작했어요. 큰아이가 벌서 마흔 살이에요. 아마 이곳 주민들 대부분이 저와 비슷할 거예요. 산이포 사람들 처럼 철책이 처지면서 우리 마을로 들어온 분들도 있고요.”

주민들을 쫓아내면서 정부 차원에서 대책이 있지 않았나요?

정부에서 지원금을 보조해 줬어요. 집을 지을 때 주로 벽돌집을 지어줬는데 집 한 동을 지으면 두 집이 같이 살았죠. 그런데 그것도 얼마 안 가서 이북에 민간인 사는 모습이 보이면 안 된다며 집을 모두 철거해 버렸어요. 그 후 아마 1982년 정도 됐을 거예요. 정부에서 지원금을 보조해 주면서 저 너머(덕하리를 말함)에 집을 먼저 짓고, 다음 해에 지금 여기 철산리에도 집을 지어줬지요. 저희가 현재 사는 이 집과 당산리와 숭뢰리 등 전방에 지은 집들이 대부분 그당시 국가 보조금으로 지어진 집들이에요. 주민의 의사를 고려한 게 아니라 반강제적으로 지어진 것들이죠.”

80년대까지만 해도 남과 북이 자신들이 더 잘 산다는 것을 서로에게 자랑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니 북한에서 바로 바라보이는 이곳 철산리의 집들을 지원금을 주면서 새로 짓게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마을의 집들이 거의 다 같은 모양새다. 한꺼번에 짓다 보니 설계가 비슷비슷했을 것이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전에는 대남방송 때문에도 힘들었을 텐데요?

철산리는 강화에서도 최전방 지역으로 북한과 가장 인접한 곳이지요. 남북이 서로 방송을 엄청 해대는 곳이에요. 우리 마을 사람들은 임수경 씨가 평양에 간 것을 대남방송 듣고 알았을 정도였어요. 그러니 남한에서도 북쪽에 방송을 얼마나 많이 했겠어요. 그런데 대북 방송 때문에 주민들이 더 힘들었어요. 이쪽에서 북으로 하는 방송이 우리한테는 더 크게 들리니까요. 대남, 대북 방송으로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상생활을 하기 힘들 정도였어요. 그러니 마을 사람들 피로도가 장난 아니었지요. 다행히 그 방송이 작년부터 없어져서 살 것 같아요.”

북녘 산을 바라보며 철산리 들판에서 수확하는 장석홍 씨

철산리와 당산리 경계는 봉천산이 북쪽 해안까지 뻗은 곳이고, 북한(해창리)까지 가장 가까운 곳이다. 이곳에도 다른 강화의 해안가처럼 돈대가 있는데, 그곳 널다리돈대(석우돈대) 위에 콘크리트 공사를 해서 대북 방송용 확성기를 설치했었다고 한다. 문화재 보호보다 안보가 더 우선시되던 시대의 유산이다.

오죽하면 군수 연두순시 때 유병돈 전 이장이 밤에는 대북 방송을 하지 말아 달라는 건의를 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런 문제는 사실 철산리 주민들보다 외지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을 더 놀라게 했다. 총을 든 해병대원이 검문하는 것을 보고 긴장했는데, 갑자기 북한에서 들려오는 북한식 말투와 노래를 들으면 말 그대로 화들짝 놀랐을 것이다. ‘! 여기가 최전방이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을 것이다.

- 2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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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용 2020-11-26 08:59:52
감사합니다.. 덕분에 강화의 현대사를 조금더 알게 되었습니다...
사라진 포구와 남아있는 사람들이야기 부탁해요!^*^

이광구 2020-11-28 12:46:18
산이포에서 쫓겨난 분들에게
이제라도 적절한 보상을 해드려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