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송암 유경근 선생을 아십니까?
독립운동가 송암 유경근 선생을 아십니까?
  • 박흥열
  • 승인 2020.09.04 18:0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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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의 근대정신을 상징하는 송암 유경근 선생
강화의 은인, 성재 이동휘 선생과 막역지우
송암 유경근 선생 일대기, 책으로 엮어
독립지사 송앙유경근 선생 일대기 표지 (유부열 지음)
독립지사 송암 유경근 선생 일대기 표지 (유부열 지음)

강화 근대정신을 대표하는 송암 유경근 선생

3.1독립만세운동의 여진이 남아있던 1919721, 서울 종로의 조선여관에서 한 독립운동가가 일경에 체포되었다. 그는 1914년 이후 6년 동안 조선여관을 아지트로 삼아 은밀히 국내외 독립운동을 연결한 인물로 주로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전달하거나, 국외 무장독립투쟁에 참여할 청년들을 모집하여 밀송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분이 바로 강화의 독립운동가 송암 유경근이다. 그는 1903년부터 강화에서 교육구국운동을 시작한 이래로 기호흥학회, 대동단 활동, 임시정부 국내 연락책, 해외 망명과 피체등 줄기차게 독립운동에 매진했던 분이다또 젊은이들을 조직하여 강화, 김포, 통진 지역의 독립운동가 양성, 3.18만세독립운동의 전개과정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의 삶을 되돌아볼때 이건승, 이동휘, 박헌용, 윤명삼 등과 함께 1900-30년대에 이르기까지 강화의 근대정신을 대표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겠다.

송암 유경근 선생 일대기를 책으로 엮다.

송암 유경근 선생의 손자  유부열 선생(일대기 저자)
송암 유경근의 손자 유부열 씨(일대기 저자)

201911,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송암 유경근의 삶이 한 권의 책으로 출판되었다. 송암 유경근의 손자 유부열(송암 유경근 일대기 저자)씨의 말이다.

손자인 제가 자료를 모아 쓰지 않는다면 조부님의 행적을 정리할 사람이 없겠다 싶어 10년정도 자료를 모아서 2016년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쓰다보니 부족한 부분이 너무 많아 다시 공부를 했습니다."

책의 맨 앞 <감사의 인사>에서 도움을 주거나, 만났던 분들을 일일이 기록했는데 그것만 보더라도 어느 정도 자료수집에 공을 들였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저자는 지금 또다른 책을 준비 중이다.

조부님의 주변 인물들을 조사하여 그분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을 준비 중입니다. 3년 정도의 기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합니다. 이동휘 선생을 비롯하여 윤명삼, 박헌용, 이득년, 강대흠, 조종환, 황도문, 조기신, 정인섭, 박길양, 윤종석, 오영섭 등 수많은 강화의 독립운동가들이 조부님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이분들과 조부님의 관계를 좀 더 깊이 파고들 생각입니다.”

저자의  작업은 매우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는 1900년 초부터 해방 전까지 강화의 근현대 역사를 정리하는데 필요하다. 특히 강화의 지식사회가 어떻게 형성되었고, 지도자들의 역할과 그들이 지역 안에서, 또 국내외 활동과 어떤 연계를 맺었는지 파악하는 계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강화의 은인 성재 이동휘와 막역지우

유경근은 1937년 회갑때 축시 한편을 받는다. 축시의 내용은 유경근, 강화의 은인인 성재 이동휘, 그리고 축시를 보낸 이가 막역지우(莫逆之友)임을 알 수 있게 한다.

...
새로운 思潮가 이 땅을 휩쓸 때
손맛잡고 일하든 그 동무 東輝
너는 어이 그리 수이 도라갔느냐.

東輝야 네 靈魂 어디있걸랑
내 오늘 이날을 축하해다오.
그러나 원망일랑 하지마러라.

내 이제 한平生 六十을 살았거니
이사파 비고해 몇해나더사리
네손목 잡을날 머지않고나.
...

시조에서 보듯 당시 강화사람들이 이동휘에 대해 가졌던 생각이 어떠한지를 짐작케한다.

유경근은 1935년 2월 강화에서 1월 31일 블라디보스톡에서 병사한 이동휘 추도식 준비를 주관했으나 일제의 불허로 개최되지 못했다.

유경근은 이동휘가 만주로 망명하기 전 강화에서 동지들과 앞으로의 활동에 대해 긴밀히 논의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를 알 수 있는 것이 유경근은 이동휘가 만주로 떠난 뒤 1914년 곧바로 서울로 활동 근거지를 옮긴다. 이동휘는 1914년 만주 나자구에 나자구무관학교(대전무관학교)를 설립하는데, 유경근은 독립군 지원병력을 모아서 밀송하는 일을 맡았다. 대동단 활동에도 깊이 관여한다.

이동휘는 우리나라 최초로 사회주의 정당을 만든 분이지만 그분은 사회주의를 이용하여 독립운동을 했던 비주류셨습니다. 일본제국주의에 맞서다보니 그리 된 것 같은데,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은 독립을 위해서라면 누구하고도 손을 잡고 받아들인 경향이 있거든요. 훗날 공산주의 세력들이 개인숭배나 전제정치로 변질되었지만 말입니다.”

연미정 일대의 역사를 더욱 풍부하게

저자의 말이다.

월곶은 강화읍 다음으로 많은 사람이 살았던 곳입니다. 아이들이 지붕위에서 놀았다고 할 정도로 집들로 꽉 찼던 곳이었지요.

그리고 연미정 아래 월곶포구에서 배를 타면 서울로 가장 빠르게 갔습니다. 하루 두 번 배가 다녔으니 조부님께서는 누구보다 빨리 정보를 취할 수 있었던 것이죠. 조부님께서 1903년에 집의 바깥채에 광창학교를 설립합니다. 그리고 강화진위대장 이동휘선생이 부임하여 1904년 진위대 진영 안에 대중(臺中)학교를 세웁니다.

처음에는 군인 자녀만 받다가 조부님, 이동휘, 화도의 윤명삼 세분이 의기투합하여 함께 육영학교로 바꾸고, 1905년 학생 20여명을 데리고 고종황제를 배알하러 갑니다. 여기서 보창학교라는 명칭을 하사받습니다.

당시의 교통사정을 감안할 때 월곶나루에서 배를 타고 세 어르신이 함께 가신 게 아닐까 생각해요. 강화3.18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신 조기신 선생의 유족을 만났을 때 이 분도 이들 학생 중의 한 명이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책에서 눈에 띄는 인물이 있다.

의당 이득년이다. 독립유공자 공훈록에는 경기도 고양 출신이라고 적혀 있으나 하점면 창후리 출신이다. 일본 와세다대학에 유학을 했으며,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득년은 1919년 유림에서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독립을 호소하는 파리장서(長書)를 보낸 일(파리장서사건)에 깊숙이 개입하였다. 독립군 기지건설을 위한 자금을 모집하고 전달하였으며, 1932년에 독립운동가였던 동관 박헌용이 <속수증보강도지>를 쓰자 교열을 보기도 했다.

당시 일본 와세다대학에 유학했다면 재력이나 이런 것들이 대단했겠죠. 특히 이분은 1921년에 사회주의 조직인 <서울청년회>가 결성될 때 잠시 대표를 맡기도 합니다. 그전에는 국채보상운동에도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지식인들이 군주제보다는 공화정이나 사회주의에 더 우호적이었는데, 일본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수단으로 잠시 사회주의 단체의 대표를 맡은게 아닐까 싶어요.”

이득년 선생이 독립군 기지건설 군자금 모집을 조부님에게도 알렸고, 금광을 운영하시던 조부님이 상당금액을 보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1925년 추석을 맞이해서 이득년 선생이 감사패(자개패)를 조부님께 주시거든요.”

그리고 일부 자료에서 이득년(李得秊)을 이득계()로 표시하는데 잘못된 것이다. ()은 년()의 고자로 번갈아 쓰기도 한다. 네이버, 다음 포털 등에서 검색하면 아직도 이득계(李得季)라고 표기한 곳이 자주 눈에 띈다.

조선여관을 중심으로 펼친 유경근의 활약상은 흥미진진하다.

일제가 지배하는 서울의 한 복판에 아지트(조선여관, 지금의 보신각 뒤편)를 마련하고 6년에 걸쳐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또 강화,김포,통진의 젊은이들을 독립운동가로 양성한 일은 영화 못지않은 스토리가 있다.

조선여관을 찾는데 10년이 걸렸습니다. 건국대학교를 설립한 유석창 선생 관련 논문에서 그분이 조선여관에서 구휼활동을 했다는 얘기가 나온 걸 보고, 의학사를 전공하는 교수님으로부터 조선여관 장소를 알게 된 것이죠. 처음 그걸 발견하고 펑펑 울었습니다. 조선여관은 강화사람이 운영한 것입니다.”

송암 유경근 선생 묘소
송암 유경근 선생 묘소

지금 월곶리에는 송암 유경근의 묘소가 있다. 연미정에서 신당리로 향하는 길 편에 있다.  잘 가꾸어져 있으나 비석에 독립운동가라고만 새겨져 있을뿐 다른 표식은 전혀 없다. 독립운동을 통해 주체성과 근대정신을 드러낸 강화의 대표적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알림판 조차 없다는 것이 안타깝다.

또 연미정 맞은 편에는 선생이 세웠던 학교(광창학교->월호보창학교->광명학교로 바뀜)와 월곶교회가 자리했던 집이 있다. 저자에 의하면 바깥채가 학교, 안채가 교회였다고 한다. 지금은 다 사라지고 없다. 그럼에도 송암 유경근의 삶이 스민 연미정 일대의 역사가 한층 풍부해지는 듯 하다.

공공기관에서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정리하는데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여기저기 자료가 흩어져 있어서 시간이 좀 지나면 찾기 어렵게 됩니다. 세월이 더 가기 전에 국가기관이나 지자체의 적극적인 관심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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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구 2020-09-09 12:37:59
그 시절 강화 모습을 떠올려보게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