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고추 농사는 끝났다
올해 고추 농사는 끝났다
  • 문연상
  • 승인 2020.09.03 17:23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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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연상 큰나무 캠프힐(양도면 도장리) 대표는 발달장애 청년들과 함께 카페, 천연뱔효빵, 농사, 양봉일을 주로 하고 있고, 마을 안에서 더불어 사는 삶을 위해 일하며 살고 있습니다.

올해 고추 농사는 끝났다.

긴 장마 덕분에 고작 두어 번 따고서는 도저히 탄저를 견딜 수 없어서 죄다 뽑아버렸다. 아직 빨갛게 익어가고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균에 먹힌 자국이 선명해서 봐주기가 힘들다.

그나마 두어 번에 너댓 가마니 정도는 건조기에 돌렸으니 선방한 건지, 고추 값 비싸다는데 다행인건지 어떤지 알 수 없지만 조금은 허무하고 아쉬운 마음이다. 몇 년 전에는 서리 내릴 때까지 길게 가면서 마지막까지 다 따먹은 기억이 있는데 맘먹은 대로 안되는 것이 하늘이 허락해야 하는 일인가 보다.

고추를 심을 때 너무 띄엄띄엄 심는 거 아니냐고 누군가 물어왔었다. 내가 아는 지식으로는 고추는 통풍이 잘되고 빛이 잘 들어와야 해서 널찍하게 45센티로 했는데 너무 넓다는 거다. 누구는 25로 했다하고 또 35정도가 맞다는 말도 있었다. 전문가가 아니니 내가 뭐라 하기는 그렇고 경험상 45가 맞다고 보았다.

워낙 더운 여름에도 잘 자라는 특징이 있어 간격을 최대한 넓혀야한다고. 그러니깐 이것도 거리두기가 필요한 거였다. 가깝게 많이 심어서 많이 뽑아낼 수 있을 거 같지만 그게 아닌 거다. 오히려 밀식할수록 병도 잘 걸리고 생산량도 줄어들어서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

적절한 거리가 주어지면 바람도 들고 햇빛도 잘 들어온다. 거리가 맞으면 부딪힐 일도 줄어들고 감염이니 전염이니 하는 것들이 약해진다. 거리가 맞으면 들락날락 하면서 일하기도 편하다. 떨어져 있으니 부딪힐 일 없고 햇빛 잘 받아 잘 큰다. 아등바등 거리는 것들, 빽빽한 것들, 서로 고개 쳐들고 경쟁하는 것들은 좋은 것 같으면서도 서로 죽이는 길이다. 아무래도 45가 맞는거 같다.

그래도 초보는 경험이 짧아서 일찌감치 고추를 뽑았다. 걸어놓은 줄은 놔둔채 두둑따라 뿌리만 뽑아 올렸다. 잔뿌리까지 밑동이 통째로 드러난 거다. 며칠 지나니 고추는 누렇게 말라버렸다. 그래도 한 철 푸른 던 것들이었는데 흙을 떠나니 순식간이다.

활착이라고 했던가. 다들 뿌리가 있어서 땅에 내리며 살아간다. 사람도 그렇고 식물도 그렇고. 뿌리 없이 부유된 인생이라 하면 가벼우면서도 얼마나 허무할까. 뿌리가 흙을 벗어나면 어떻게 되나. 누군가로부터 받아들여지지 않는 삶이라고 하면 그만큼 힘든 것도 없을 거다.

무언가를 심는 다는 것은 받아들여지도록 하는 거고, 그래서 놓일 땅과 심을 작물을 보게 된다. 땅을 만들고 거름을 내고. 더불어 좋은 종자를 구하다가 심는다. 물을 주고 풀도 메고, 줄을 띄우며 약도 주면서. 그렇게 해도 하늘이 도와주지 않아 일찍 뽑아내긴 했지만 여름 한철 고추는 싱싱하고 푸르고 단단했다.

강화로 들어올 때의 일들이 생각난다.

아는 사람이 없었다. 도로에서 7백 미터 외길을 따라 들어오는 땅에 정착을 해 내야할 임무가 주어졌다. 혼자 들어 오는 게 아니라 여러 가족이었고, 그중에는 발달에 장애가 있는 분들이 있었다.

큰나무 캠프힐. 건물 뒷쪽에서 찍은 모습. 멀리 마니산이 보인다. 

지금이야 자리가 잡혔지만 초반에 외지인은 모든 게 낯설고 힘들었다. 장애인 시설을 짓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의 눈초리, 경계하는 듯한 말들, 어리숙한 농사의 일들, 필요한 건축물을 올려야 하는 과제들. 내 몸 하나 정착도 쉽지 않은 것을 여러 사람들과 도모하여 활착을 이루어야 했다.

들어오는 진입로는 단 두 개. 차 한 대 지나가면 비켜줘야 하는 좁은 길을 따라 들어와야 하는 땅이었다. 낯선 세계를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곳이었다. 어떻게 뿌리를 내릴 것인가. 땅을 구입해서 측량을 마치고 말뚝을 박으면 뿌리가 내려지나. 모종 사다가 땅에 박아놓으면 알아서 뿌리가 내려지나.

몇 년의 세월이 흘러 뒤돌아보니 활착은 저절로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땅이 받아주어야 가능한 거였고, 하늘과 바람이 도와 줘야 하고, 식물은 식물대로 무진장 애를 써야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아무리 좋은 종자여도 땅이 받아들여주지 않으면 안 된다. 좋은 뜻과 명분만으로는 정착이 쉽지가 않다. 받아들여져야 하고, 서로의 노력이 건강한 정착으로 이루어지는 거였다.

다닥다닥 붙어 있다가 확진자가 쏟아져 나왔다. 떨어져 있으라는 당부를 거부한 사람들로 인하여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다. 위험하다고 했었다. 너무 붙어있지 마라고. 적절히 떨어져 있으라고. 있어야 할 자리에 잘 있는 것이 중요한 때가 되었다.

누구나 다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것이 중요하다. 적절한 거리, 본분을 잊지 않는 처신, 선을 넘지 않는 행동들. 있어야 할 자리에서 제 역할을 충분히 실현해 나가는 것이 미덕이다. 목사든 의사든 누구나. 그리고 고추도 역시 45센티미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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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구 2020-09-03 18:48:51
해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가슴에 와닿는 얘기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