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시인'의 고장 강화도 ..송강과 석주
'위대한 시인'의 고장 강화도 ..송강과 석주
  • 이광식(천문학 작가)
  • 승인 2020.08.03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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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한 편 때문에 목숨 잃은 권필과 강화에서 종생한 정철

강화에서 반생을 보낸 '시의 순교자' 석주 권필

강화도가 예로부터 위대한 시인의 고장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그다지 많지 않은 듯하다. 온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든  임진란이 한바탕 쓸고 지나간 후, 조선조 최고의 문장가이자 시인이었던  권필(權韠;1569~1612)은 세상에 뜻을 접고 강화도로 은거했다.​

송강 정철의 문인으로 호를 석주(石洲)라 했던 권필은 당시 문단에서 동악(東岳) 이안눌과 함께 양대산맥을 이루는 최고 시인으로 평가받았다. 날카로운 현실인식과 호방한 시풍으로 당대에 시의 대가라는 평을 들었던 권필은 <홍길동전>의 허균과 막역한 사이였으나, 권신 이이첨이 친교를 청하는 것은 한사코 거절한 강직한 성품이었다.

​워낙 벼슬에는 뜻이 없어 산수를 찾아 방랑하며 술과 시로 살아가는 풍류인이었던 권필은 늘 가난한 살림에 허덕일 수밖에 없었다. 보다 못한 동료 문인들이 힘을 써 종9품 말단직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었으나 권필은 사양하고 끝내 취임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제학 월사(月沙) 이정구가 대문장가로 알려진 명나라 사신 고천준(顧天俊)을 접반하게 되어 문사(文士)를 엄선할 때 석주가 야인으로서 이에 뽑혀 문명을 떨쳤다.

세상에 뜻을 접은 권필이 강화도 고려산으로 은거하자 많은 유생들이 몰려와 가르침을 청했다. 그는 석주 초당을 열고 후학을 양성했다. 그러나 시대는 이 대시인을 그대로 두지 않았다. 스승 송강 정철이 정적을 제거하는 선조의 칼잡이로 이용당하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은 데 이어, 그 제자 권필은 선조의 아들 광해군에게 매를 맞고 죽었으니, 이런 불운한 사제가 하늘 아래 다시 없을 것이다. 그것도 시 한 편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니, 유사 이래 없었던 일이었다.

물론 광해군에게 직접 맞아서 죽은 것은 아니지만, 왕의 친국에서 혹독한 곤장을 맞은 후, 유뱃길에 올라 동대문 부근 주막에서 하룻밤을 묵을 때, 따라온 친구들이 사준 술을 폭음하고는 그 밤으로 세상을 하직했으니, 광해군에게 맞아죽었다는 말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닌 셈이다. 권필에게 화를 불러온 시는 그가 지은 ‘궁류시(宮柳詩)’로서, 왕비의 오라버니 유희분의 전횡을 풍자한 내용이었다.

대궐 안 버들이 푸르르니 꽃잎 흩날리고 
성 안 가득한 벼슬아치들은 봄빛에 아양 떠네 
조정에선 태평성대라 서로들 치하하는데 
누가 위험한 말을 선비에게서 나오게 했나  

세간에서는 다들 ‘궁궐의 버들’을 광해의 처남인 유희분이라고 생각했다. 즉, 버들 유(柳)씨인 유희분을 빗대서 쓴 거라고 보았던 것이다. 광해가 발끈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시류를 비판한 궁류시가 광해군 귀에 들어가자 왕은 불같이 노해 시인을 잡아들이게 했다. 그의 아버지 선조가 일찌기 권필의 시에 찬탄하여 늘 서안 위에 올려놓았다는 그 시인이었다.

권필의 문재를 아낀 좌의정 이항복이 왕을 만류하고 나섰다. 시 때문에 선비에게 형장을 치는 것은 성덕에 누를 끼치는 일이라며 한나절을 버티었다. 영의정 이덕형도 옆에서 힘써 거들었지만 광해군은 끝내 굽히지 않았다. 마치 역적을 대하듯  왕의 친국에서 심한 고문을 당한 권필은 들것에 실려 해남으로의 유뱃길에 오른 첫날밤, 동대문 밖 어느 주막에서 따라온 친구들이 사준 술을 통음하고는 표표히 세상을 뜨고 말았다. 한 시대를 주름잡던 대시인의 허무한 죽음이었다. 그의 나이 겨우 마흔 셋이었다.

그의 죽음을 전해들은 광해군은 “하룻밤 사이에 어찌 죽을꼬?” 하고 중얼거렸다 한다. 분명 후회하는 빛이었다. 이항복의 낙담은 더욱 컸다. “우리가 정승으로 있으면서도 석주를 못 살렸으니, 선비 죽인 책망을 어찌 면할꼬” 하고 자탄했다. 

시 한 편 때문에 광해군에게 목숨을 잃은 권필의 유허비. 권필이 초당을 세웠던 곳인 강화군 송해면 하도리 초당 터에 권필의 후손이 세웠다.(사진/김향)

권필이 강화에 은거하며 후학들을 가르친 송해면 하도리에 있는 서당터에는 권필의 후손이 세운 ‘석주권선생유허비(石州權先生遺墟碑)’가 남아 있다. 고려산 기슭의 하도저수지 옆으로,  송강이 만년을 보낸 송정촌(松亭村)과는 십리 남짓한 거리다. 조선 시대 여러 차례의 사화로 아까운 선비, 인걸들이 수없이 죽어나갔지만, 시 때문에 목숨을 잃은 이는 권필뿐이었다. 그는 시의 순교자였다. 그의 묘는 경기도 고양시 일산 땅에 있다. 고양땅에 있는 정철의 첫 유택과도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인연이란 원래 서로 얽히는 것인지, 그가 죽은 지 11년 뒤 인조반정으로 폐위된 광해군이 유배 간 곳이 바로 강화도였다. 폐왕은 석주 초당이 있는 곳의 지척에서 귀양살이를 하다가 나중에 다시 제주도로 옮겨가 거기서 생을 마감했다. 지하의 시인은 자기가 살던 곳으로 쫓겨온 왕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끝으로, 권필이 남긴 시조 한 수를 내려놓는다.

이 몸이 되올진대 무엇이 될꼬하니
곤륜산 상상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군산에 설만雪滿하거든 홀로 우뚝하리라. 

송강이 임종을 맞았던 강화 송정촌(숭뢰리). 한강은 여전히 흐르지만 마을은 사라지고 집터도 알 길이 없다. 소나무 정자가 있었다고 해서 송정촌이라 했다.(사진/김향)

송강 정철이 생을 마감한 곳도 강화도 

권필의 스승이기도 했던 송강 정철이 강화에서 굶어서 죽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 역시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강화대교 초입에서 해안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십리쯤 가다 보면 길섶에 ‘숭뢰리’라 새겨진 장승이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전에 송정촌이라 불리던 마을로, 강화만으로 흘러드는 한강 줄기가 빤히 내려다보이는 곳이다. 이곳 어느 허름한 농가에서 한 달 남짓 송강은 끼니를 잇기 어려울 정도로 궁핍한 생활을 하다가 영양실조로 숨을 거두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이듬해 연말이었다.

송강은 그 노경에 어쩌다 홀로 강화까지 흘러들어왔을까? 조선문학의 최고봉이요, 한때는 서인의 거두로서 서슬 푸른 권력을 휘둘렀던 송강이 대체 어쩌다가 강화섬으로 흘러들어 겨울 저녁 풍경처럼 스산한 말년을 보내다가 홀로 쓸쓸히 죽어갔단 말인가?

여기서 파쟁과 유배로 점철된 그의 굴곡진 생애를 죄다 둘러볼 수는 없지만, 강화행 직전의 상황을 간략히 살펴보면, 임진난을 맞자 선조는 유배 중인 송강을 불러 명나라 사신으로 보냈다. 하지만 사신을 다녀온 후 모함을 당하자 송강은 스스로 임금에게 사면을 청하고는 강화로 은거했다. 그가 은거처를 강화로 정한 것은 당시 강화에 살던 그의 문인 권필과 관계가 있을 법하다는 추측과 함께, 혹 나라에서 급히 부를 때 바로 달려가기 위한 노신의 충정 때문이 아니었을까 짐작할 뿐이다.

강화에서의 송강의 생활은 비참했다. 당장 생계를 꾸리기도 버거운 형편이었다. 비록 현직에서 물러났다 하더라도 여전히 정승 직책을 지니고 있던 송강이었지만, 워낙 청렴한 성품이라 무엇 하나 챙겨둔 것이 없었던 터이다. 그가 얼마나 궁핍에 시달렸나 하는 것은 친구에게 보낸 편지로도 알 수 있다.

“내가 강화로 물러나온 후 사면을 둘러보아도 입에 풀칠할 계책이 없으니 형이 조금 도와줄 수 없겠습니까? 평일에 여러 고을에서 보내온 것도 여지껏 감히 받지 않았는데, 장차 계율을 깨뜨리게 되니, 늘그막에 대책 없이 이러는 게 못내 부끄럽습니다. 그러나 형처럼 절친한 이에게서도 약간의 것인즉 마음 편하겠지만, 많은 것은 감히 받을 수 없습니다.”

송강의 곤궁함과 염치가 손에 잡힐 듯하다. 송강이 죽기 직전에 남긴 마지막 시에도 그의 고단한 삶이 그대로 묻어 있다. 

외로운 섬 나그네 신세 해조차 저무는데
남녘에선 아직도 왜적 물리치지 못했다네
천리 밖 서신은 어느 날에나 오려는지
오경 등잔불은 누굴 위해 밝은 건가
사귄 정은 물과 같아 머물러 있기 어렵고
시름은 실오리 같아 어지러이 더욱 얽히네
원님이 보내온 진일주(眞一酒)에 힘입어
눈 쌓인 궁촌에서 화로 끼고 마신다오.(박영주 역) 

송강의 이런 고단한 삶도 그리 오래 가지는 않았다. 은거 한 달 남짓 만에 숨을 거두었던 것이다. 사인은 영양실조였다 한다. 향년 58세. 온 나라가 환란 중에 있었던 1593년 12월 18일, 추운 겨울날 송강은 굶어죽었던 것이다. 대시인의 비참한 종생이었다.

송강이란 인물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송강과 동갑내기로 같이 벼슬살이를 한 율곡 이이가 “송강은 충직하고 맑으며 의로운 선비다. 다만 성격이 편협하여 아량이 적은 것이 흠이다”고 평한 것을 보면, 그가 왜 당쟁의 한가운데서 수많은 정적을 만들며 파란만장한 삶을 살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으며, 백사 이항복이 “송강이 손뼉 치며 담소하는 것을 보면 마치 신선을 보는 듯하다”고 말한 것을 보면 그가 타고난 시인임을 알 수 있다.

송강은 죽은 후 선영이 있는 경기도 고양땅 신원리에 묻혔다가, 70여 년 후 우암 송시열의 주선으로 충북 진천 환희산 자락으로 이장되었다. 지금의 송강사이다. 송강의 문인으로 강화에 같이 인연을 맺었던 권필이 송강 묘를 찾아 지은 칠언절구가 전한다.

빈 산에 잎지고 궂은비 내리는데  空山木落雨蕭蕭 
재상의 풍류 또한 이같이 쓸쓸하네  相國風流此寂寥
슬프다 한 잔 술 다시 올리기 어려우니  惆悵一杯難更進
예전의 그 노래는 오늘을 말함인가  昔年歌曲卽今朝

‘예전의 그 노래’는 송강의 사설시조 ‘장진주사(將進酒辭)’를 말한다. 저 멀고도 고적한 곳, 북망(北邙)의 적막한 정경을 우리 눈앞에 파노라마처럼 펼쳐 보이며 술 한 잔을 권하는 절창이다. 

한 잔 먹세그려 또 한 잔 먹세그려 꽃 꺾어 산 놓고 무진무진 먹세그려 
이 몸 죽은 후면 지게 위에 거적 덮어 주리혀 매어가나 유소보장에 만인이 울어예나
어욱새 속새 덥가나무 백양숲에 가기곳 하면
누른 해 흰 달 가는 비 굵은 눈 소소리바람 불 제 뉘 한 잔 먹자 할꼬 
하물며 무덤 위에 잔나비 파람 불 제 뉘우친들 어찌리

'누른 해 흰 달 가는 비 굵은 눈 소소리바람...'  북망의 스산한 풍경을 단어 몇 개로 어쩌면 저렇게 손에 잡힐 듯이 그릴 수 있을까. 가히 대가의 솜씨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송강의 자취를 조금이라도 찾아볼 수 있을까 하여 연전에 송정촌에 들러 마을 어르신을 붙잡고 송강이 만년을 보낸 집터를 물어보았다. 예전엔 한강이 마을 바로 앞에까지 들어와 있어 송정포라 했는데, 포구 어름의 어느 허름한 농가에서 잠시 살다가 죽었다는 것, 그리고 가끔 고려산 아래 사는 젊은 선비가 찾아오곤 했다는 말을 전해들었을 뿐이라 한다. 그 선비는 아마 송강의 문인 권필 시인이리라. 그뿐, 어디에도 송강의 자취는 찾을 길이 없어 서운한 마음을 안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하기사 벌써 4백 년도 더 전의 일. 흐르는 바람 따라 자취 없이 사라지는 게 어디 그뿐이랴. 

하지만 송강의 전후 미인곡과 관동별곡을 일컬어 "우리나라의 참된 문장은 이 세 편뿐"이라고 서포(西浦) 김만중이 평했듯이 송강의 명구들은 아직까지 살아남아, 요즘도 나는 '관동별곡'의 결구를 가다끔 읊조리곤 한다. 강화도와 석모도 사이를 흐르는 강석해협에 푸른 달빛이 휘영청할 때면 어김없이 이 구절이 읊조려지곤 하는 것이다.

"명월이 천산만락(千山萬落)에 아니 비쵠 데 없다."

어떤 진경산수화보다 아름답지 않은가! 

필자 이광식(내가면 외포리 거주)은 젊은 시절부터 품었던 화두, '우주란 무엇인가?'를 주제로  <천문학 콘스트>를 출간한 후, <십대, 별과 우주를 사색해야 하는 이유> <잠 안 오는 밤에 읽는 우주 토픽> <별아저씨의 별난 우주 이야기> <내 생애 처음 공부하는 두근두근 천문학>  <우주 덕후 사전> 등을 내놓았다. 지금은 강화도 퇴모산에서  '원두막 천문대'를 운영하면서 일간지, 인터넷 매체 등에 우주·천문 관련 기사·칼럼을 기고하는 한편, 각급 학교, 사회단체 등에 우주특강을 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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