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환의 江華漫筆 10 - 질문하고 저항하며 살기
홍성환의 江華漫筆 10 - 질문하고 저항하며 살기
  • 홍성환
  • 승인 2020.03.23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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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말하는 대로 믿고 하라는 대로 하는 사람은 자유인이 아니라 노예다. 민이 주인인 민주주의 사회라지만 우리는 여전히 누군가의 노예로 살기 쉽다. 돈을 가진 자는 돈으로, 권력을 가진 자는 권력으로, 심지어 종교지도자는 권위로, 지식을 가진 자는 지식으로 우리를 지배하려 한다.

 

소위 묻지마 신앙이 있다. 이것의 폐해는 실로 심각하다. 지식인들도 교회만 가면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아무런 의심 없이 맹목적인 신앙을 갖는다. 그 어리석음이 신기할 정도다. 목사는 질문하고 따지고 의심하는 신자들을 싫어하고, 나아가 그런 사람들을 믿음이 없거나 이단이라고 정죄한다.

 

학교에서도 주입식 교육을 받은 모범생들은 정답만을 배우기 때문에 인생이나 세상 일이 마치 정답이 있는 것처럼 한 길로만 가려고 한다. 인생과 세상은 복잡한 것이고 사람도 다 다르기 때문에 하나의 정답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무수한 답이 있다. 요즘 어떤 스님이 즉문즉설이라는 걸 하는데 좀 위험한 것 같다. 그 이의 말은 참고할 정도이지 따라야할 정답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이 자기답게 살려면 질문할 줄 알아야 한다. 질문할 줄 모르면 누군가의 생각에 놀아나 조종당하며 살게 된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의 종노릇하기가 쉽다. 돈이 하자는 대로 하면 돈의 노예다. 그럴 때 인생에서 돈이 그렇게 중요한 것인지 자문해 보아야 한다. 그래야 돈보다 더 중요한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우리 속에는 자기도 모르게 많은 선입견이 들어와 있고 그것이 자기를 형성하고 있다. 의심하지 않고 묻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은 편견이다. 보통사람은 이런 편견이 가득하다. 그것이 편견인지도 모르고 자기주체성이라고 우기고 사는 것이 어리석음이다. 이런 편견을 제거하자는 것이 영성이다. 영성이란 이런 편견을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보는 것이다. 자기를 내려놓을 때 자기의 본래 모습이 보인다.

 

불교가 가르치는 부정의 방식은 편견에서 벗어나는데 도움이 된다. 반야심경에는 생도 없고 멸도 없고 마음도 없고 깨달음도 없고 불법도 없고 늙음도 죽음도 없고 아는 것도 얻는 것도 없다고 했다. 지금 나라고 하는 것을 통째로 부정할 때 나의 본래의 모습 진면목이 드러난다. 임제선사는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심지어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했다. 나를 노예로 삼으려는 자들에 대해 그들이 설사 성인이나 부처님이라 해도 의문을 품고 저항하라는 것이다. 부처님 자신도 나를 의지 하지말고 진리(불법)를 의지하라 했다.

 

기독교인에게 목사나 신부를 믿지 말고 심지어 예수님도 믿지 말고 그들을 만나면 목을 치라고 한다면 기절초풍할 것이다. 그 누구의 말도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고 의심하고 질문하고 저항하며 치열하게 구도의 길을 가자는 것이 자유인의 영성이다. 불경이나 성경을 무조건 믿는 것은 노예근성이다. 그 시대 그 상황에서 한 말이 지금의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따져 물어야 한다. 그것을 상징이나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고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고 달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서구사회가 이미 탈종교 사회로 접어든 것은 기성종교들이 달은 보지 못하고 손가락만 빨고 있기 때문이다.

 

함석헌 선생은 들사람 얼을 강조하며 자신을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 했다. 그는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예수님만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대속의 교리를 부인했다. ‘흰 손이라는 시에서 남을 위해 자기 손에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예수님처럼 십자가는 지지 않고, 십자가를 타고 가려는 흰 손을 가진 교인들에게 하느님의 심판이 임한다고 선언했다. 5.16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은 정치군인에게 즉시 권력을 내려놓고 군대로 돌아가라 했다. 그것은 당시 상황으로서는 목숨을 건 저항이었다. 그가 영어에서 제일 좋아하는 단어는 resist(저항하다)였다.

 

이런 기성 제도나 체제에 대해서 의문을 갖고 질문하고 저항하는 것은 항상 새로움을 추구하는 영적인 사람들이 해야할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질문은 자기 자신에 대한 질문이다. 나는 잘 살고 있는가?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나는 가치 있는 존재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나는 이웃들과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가? 나는 행복한가? 나는 착한가? 나는 어떤 도움과 사랑을 받고 있는가? 나는 무슨 어리석은 짓을 하고 무슨 죄를 짓고 사는가? 이런 질문들에 대해 바로 답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질문들은 골치 아프고 자신을 괴롭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적당히 살고 싶은 것이 보통사람들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은 최소한 교만할 수 없다. 그리고 질문하는 그 자체로 우리의 삶은 날마다 새로울 수 있다. 보통사람이 해야 할 가장 단순한 질문은 '나는 착하게 살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착하게 사는 것보다 더 아름답고 위대한 일은 없기 때문이다. 일상의 영성의 최종 목표는 대단한 신비적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단순히 착하게 사는 것이다. 착한 사람 하나 있으면. 그의 주위에 백만 송이 장미가 피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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