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환의 江華漫筆 9 - 용서받고 용서하며 살기
홍성환의 江華漫筆 9 - 용서받고 용서하며 살기
  • 인터넷 강화뉴스
  • 승인 2020.02.06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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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연약해서 이런 저런 실수도 하고 죄를 짓기도 한다. 간혹 완벽주의자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의 완벽주의가 자신과 남을 피곤하게 하는 죄를 저지르기도 한다. 그리고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에 대한 기준도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자신이 완전하다고 큰소리 치는 것은 자기 의를 내세우는 교만의 죄를 범하는 것이다. 자기를 돌아보며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도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인간은 선에 대한 무한한 가능성도 있지만 선에 완전히 도달하기에는 늘 역부족이다. 예수님 조차도 어떤 이가 와서 '선한 선생님이시여' 라고 부르니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십니까. 선하신 분은 하느님 한분뿐이십니다 '라고 말씀하셨다.

 

가톨릭 미사에서는 내 탓이요 내 탓이요라고 참회하는 시간이 있고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탄원하는 기도를 반복하는데 참으로 마음에 든다. 주님이 가르친 기도에도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해주십시오라는 기도가 나온다. 나는 이 기도를 드릴 때마다 용서를 받으려면 내가 먼저 나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용서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찜찜 할 때가 많다.

 

사람들은 흔히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남에게는 관대하라고 말한다. 나는 허물이 많아선지 자신에게도 관대하고 남에게도 관대하라고 한다. 자신에게 지나치게 엄격하면 그 스트레스 때문에 정상적인 삶을 살기가 어렵다.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는 것이 일상이기 때문에 나는 하느님이 용서해 주시기 전에 내가 먼저 나를 용서한다. 오늘만 그런 것도 아닌데 너무 괴로워 하지 말고 자신을 용서하고 새롭게 살라는 것이 늘 내가 나에게 하는 말이다. 이런 내가 한심하기도 하지만 괴로움으로 인생을 허비하기 보다는 스스로를 쉽게 용서하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새롭게 사는 편이 낫다.

 

아니 용서 받았으면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말아야 하지 않느냐고 스스로에게 반문하기도 하지만 어떤 어리석은 짓은 그것이 마치 고질병 같은 것이라 잘 고쳐지지 않는다. 사람마다 남모르는 이런 약점이 있다. 남을 비난하는 버릇이 있거나 화를 잘내거나 거짓말을 하거나 잘난척을 하거나 낭비를 하거나 게으르거나. 어찌보면 사소한 일 같으나 이런 것들이 다 자기와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들이다. 물론 이 보다 더 큰 악습도 있을 수 있다. 나도 사람인데 이런 것을 고쳐보려고 노력하지 않을 리는 없다. 그래도 잘 고쳐지지 않으면 용서하며 살 수 밖에 없다. 내가 본래 그런 놈인데 매일 그 문제만 가지고 씨름하면 어찌 인생을 편하게 살 수 있겠는가? 이것이 나를 용서하며 내가 스스로에게 하는 변명이다.

 

자기를 용서해야 할 더 근본적인 이유는 용서받았다는 깊은 해방감이 없으면 다른 사람도 용서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남들이 보기에 사소한 일까지 깊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자책하는 사람들은 남의 잘못도 용서하기 어렵다. 자기도 용서 못하는데 하물며 남을 용서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죄짓고 쉽게 용서받는 일을 반복하는 것을 본헤퍼라는 신학자는 싸구려 은총이라고 비난했지만 죄를 일상적으로 짓는 내가 날마다 용서받으며 마치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새롭게 살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용서라는 말할 수 없이 귀한 은총이 있기 때문이다.

 

자기를 돌아보면 남이 나에게 저지르는 잘못들은 너무도 사소한 것들임을 금방 알 수 있다. 그것은 어쩌면 악의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성향이나 가치관의 차이에서 오는 것일 수도 있다. 본래 그렇게 생겨 먹어서 그런건데 그것을 가지고 시비를 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내 경험으로 보면 어떤 이가 나를 무시하거나 부당하게 나의 권익을 침해하면 화가 난다. 자존심의 상처를 입는 것이 용서하기 제일 어려운 일이다. 무심코 하는 말이나 행동이 남을 무시하고 그의 인격을 모독할 때 우리는 큰 죄를 짓는 것이다. 자기 잘난 것을 내세우는 이들은 이런 죄를 범하기 쉽다. 좀 배웠다고 이런 것도 모르냐는 식으로 말할 때 무식한 상대방이 받는 상처는 크다.

 

영성을 추구하는 이들은 늘 자기성찰을 습관적으로 하는 사람들이다. 날마다 거울로 얼굴을 보듯 자기 자신을 들여다 보면 자기는 물론이고 남을 용서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수님은 당신은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고 하셨다.

 

물론 용서해야할 일도 있고 그렇지 못한 일도 있다. 하느님이야 나를 무조건 용서하겠지만 아니 하느님도 내가 죄의식도 없고 전혀 참회도 없고 용서받기를 갈망하지도 않는데 나를 무조건 용서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남을 무조건 용서한다는 것은 인간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인간에게는 항상 용서의 조건이 따른다. 최소한 그가 사죄를 하거나 원상 복구를 하려 하거나 무슨 참회의 표시가 있어야 용서가 가능하다. 일본의 경우에서 보듯 우리는 용서하고 싶어도 용서받아야 하는 쪽이 아무런 반성도 사죄도 배상도 하려 하지 않는다면 용서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여기에 용서의 어려움이 있다. 죄에 대해서는 정의와 보상이 이루어져야 한다. 문제는 죄를 지은 자의 참회와 배상의 수준이 어느 정도 되야 용서가 가능하냐 하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남을 용서해야할 일보다 용서 받을 일이 더 많은 나로서는 어찌하든 용서받고 용서하며 살고 싶다. 내가 무심코 가까운 이들에게 주는 상처를 생각하면 그들이 대충 넘어가주고 용서해서 그렇지 그런 일들을 일일이 다 따지면 나는 살기도 어려울 것이다. 나 자신에게나 남에게나 '그럴 수 있지, 내가 몰라서 그렇지 무슨 사정이 있어서 그럴거야' 라고 한발 물러나 생각할 수 있다면 사람 사이의 관계는 훨신 더 좋아질 것이다. 하느님이 자기 기준으로 일일이 나의 죄를 추궁하신다면 나는 벌써 하느님으로부터 도망쳤을 것이다. 나 같은 자도 내 이웃의 관용 덕에 이렇게 편하게 살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이 매일 하시는 가장 큰 일은 용서해주는 일이다. 그 덕에 사는 나도 조금이라도 용서하는 일을 할 수 있다면 하느님은 참으로 기뻐하실 것이다. 천냥의 빚을 탕감받은 사람이 동전 한잎 빚진 이를 다그친다면 그게 어찌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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