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의 은인(恩人), 성재 이동휘 선생 서거 제85주기 추모식 개최
강화의 은인(恩人), 성재 이동휘 선생 서거 제85주기 추모식 개최
  • 인터넷 강화뉴스
  • 승인 2020.01.31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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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진위대장을 역임하고 보창학교를 설립하였으며, 3.1운동의 주역인 유봉진 선생과 한글 점자를 만든 송암 박두성 선생 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강화의 은인 성재 이동휘 선생의 제85주기 추모식이 오늘(31)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렸다.

이날 행사는 ()성재이동휘선생기념사업회(회장 류준형) 주관으로 개최되었는데 양홍준 서울남부보훈지청장과 유족, 독립운동 관련 단체장 및 회원, 시민 등 100여명이 참석했다.

행사는 약사보고, 추모사, 헌화 및 분향 등의 순으로 진행되었으며 이후 선생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무후선열제단을 참배했다.

<성재 이동휘 선생 주요 공적>

이동휘 선생(1873. 6. 20.1935. 1. 31.)은 함남 단천에서 출생했다.

1899년 한성무관학교(漢城武官學校)를 졸업하고 1902년부터 강화도 진위대장(進衛隊長)으로 활동했다. 1906년 군직을 사임한 뒤, 강화도에 보창학교(普昌學校)를 설립하고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 결성에 참여하는 등 민족주의 교육과 구국계몽운동에 투신했다.

1908년 서북학회를 창립하는 한편, 안창호 등과 비밀결사인 신민회를 조직하여 계몽운동과 항일투쟁을 전개하던 중 1911‘105인 사건으로 체포되어 인천 무의도에 유배되는 고초를 겪었다. 1912년 북간도로 망명한 뒤, 김립, 계봉우 등과 광성학교(光成學校)를 설립하여 꾸준히 민족주의 교육 활동을 전개했다.

1913년에는 러시아 연해주로 거점을 옮겨 블라디보스톡의 신한촌(新韓村)을 중심으로 조직된 권업회(勸業會)에 가담하여 이상설, 이갑, 신채호 등과 함께 독립전쟁론에 입각한 민족해방 투쟁활동에 적극 투신하였으며, 1914년에는 중국 왕청현(汪淸縣) 라자거우의 한인촌으로 거점으로 옮겨 대전무관학교(大甸武官學校)를 설립하고 독립군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31운동 직후에는 블라디보스톡에서 문창범 등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고, 대한임시정부 군무총장으로 동녕현에 임시군집부(臨時軍執部)를 설치하여 독립군을 양성했다. 19198월말에는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총장 및 초대 국무총리에 취임하여 항일 독립전쟁을 전개할 독립군 양성에 헌신했다.

1921년 이후 국무총리직을 사임한 후에는 국민대표회(國民代表會) 집행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독립운동에 전력하였으나, 1935131, 블라디보스톡 신한촌(新韓村)에서 62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95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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