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서 한 필, 죽어서 한 필...강화 소창 이야기
살아서 한 필, 죽어서 한 필...강화 소창 이야기
  • 김나라(국립민속박물관 연구원)
  • 승인 2019.12.13 16: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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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글은 인천역사통신 제23호(2019년 겨울)에 실렸던 것으로 인천문화재단과 글쓴이의 동의를 얻어 게재합니다.
직기를 고치고 있는 이병훈씨와 공장내부(강화,은하직물)<출처:국립민속박물관>

1. 소창의 기원

소창(小倉)은 목화솜을 자아내어 실을 만들고 이 실을 평직으로 짠 옷감을 말한다. 소창 공장 관계자에 따르면, 사람은 태어나 소창을 살아서 한 필, 죽어서 한필사용한다고 말했다.

살아서 한 필은 어린아이 기저귀 감으로, ‘죽어서 한 필은 죽어서 관끈으로 사용한다는 것을 빗대어 표현한 것인데, 이처럼 소창은 한국인의 일생 의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또한, 소창은 무속 의례와 불교 의례에서도 많이 사용된다. 무속 의례에서 소창은 이승과 저승을 잇는 다리또는 ’, ‘삶의 질곡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무당들은 굿판에서 소창을 잘라 다리를 만들며 굿을 준비한다. 그리고 소창으로 만든 길을 따라 망자를 보내거나 소창으로 매듭을 지어 만든 고를 푸는 의례도 있다.

여기서 소창은 망자의 한을 풀어주는 역할을 한다. 아울러 고를 맺고 풀어줌으로써 인생의 어려움을 해결해준다는 상징적인 의미도 가지고 있다. 이외에도 무속에서 소창은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다.

불교 의례에서는 49재를 지낼 때 소창이 쓰인다. 사람이 죽고 이생에서 다음 생애가 결정되기까지의 기간을 불교에서는 중유(中有)라고 한다. 이 중유가 끝나고 다음 생이 결정되기 전인 48일째에 정성을 다해 영가(靈駕), 즉 영혼의 명복을 비는 것이 49재다.

이때 영혼을 모시기 위해 소창으로 인위적인 다리를 만든다. 소창 30마를 써서 펼쳐놓고 길을 만든 것은 중유에서 떠도는 영가를 데려오는 길로 삼으려는 의미다. 여기서의 길은 상징적이고 의례적이다.

의례 마지막에는 소창으로 만든 길을 태운다. 이는 영가를 맞이하고 씻어서 저승으로 보내려는 의미를 지닌다. 이처럼, 민속학적 측면에서 소창은 한국인의 종교 의례와 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소창은 비교적 근래에 직조된 직물 중 하나로, ‘직물의 고장강화도에서 주로 생산하던 직물이다. 강화도는 1910년대부터 직물 산업의 중심지로 주목받아 왔다.

19123월 매일신보를 보면, 경기도 권업계(勸業係)가 수원, 개성, 연천, 삭녕, 교동, 여주와 함께 강화를 직물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한 장소로 눈여겨보고 있었다는 기사가 있다.

이 같은 외적 자극과 강화도민의 내적 욕구에 따라 1917년 강화직물조합이 조직되었다. 이후 강화에서는 직물 품평회를 열어 심사를 통해 우수한 품질을 순서대로 등수를 매겨 시상을 했다.

직물 제작은 부녀자들이 전담했는데, 면사구입에서부터 작태-가공-와인딩-후다·정경-연경-직조-검단-판매 이 모든 과정에 섬세하고 밀도 있는 노동력이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직물산업이 발전함에 따라 강화도에서 는 집집마다 족답기한 대씩을 보유하였고, 특히 농한기 때 가계경제에 큰 보탬이 되었다고 한다. 각자의 방식으로 판매를 하였기에 가격이 일정하지는 않았으나, 외래품보다 저렴하고 품질도 우수하여 적잖은 수익을 내었다.

강화도의 직물산업은 해방 후에도 호황을 누렸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강화에 소창 공장은 약 80여 군데에 이르렀고, 직물조합도 활발히 활동했다. 하지만 나일론과 일회용품이 도입되고 보편화되면서, 강화의 직물산업은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

현재 강화는 소창만이 가내수공업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며, 그나마 2019년 기준 총 7곳만 남아 있는 실정이다.

이 글에서는 강화의 직물 중 지금까지 존속되고 있는 소창을 초점으로, 강화에서 소창이 발달할 수 있었던 요인 및 소창이 지닌 역사적 가치를 재고하고자 한다.

아울러 현재 소창이 가진 경제적 효용성과 운영상의 어려운 현실을 조명하는 한편,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해 볼 것이다.

작태한 면사를 말리는 장면(강화,연순직물)<출처:국립민속박물관>

2. 왜 강화인가?

전국을 통틀어 강화에서 유독 직물산업이 발달할 수 있었던 점은 풍부한 노동력, 개량 직기의 도입으로 인한 공동작업장 운영, 조직적인 판매경로를 꼽을 수 있다.

강화에서는 일찍이 각 가호(家戶)마다 손과 발을 사용하는 족답기사용에서 그치지 않고, 개량직기를 적극적으로 도입하였다. 개량직기를 들임으로써, 생산의 효율성을 높이고 여러 사람이 동시에 작업을 할 수 있는 공장 형태의 공동작업장을 운영하였다.

또한 소창을 판매하는 행상을 체계적으로 조직하여, 판매 루트를 전국적으로 확장하였다. 그 결과 강화의 직물은 전 조선을 넘어 간도까지 판매될 수 있었다. 강화는 직물산업의 중심이 되었으며, 해방 이후에도 직물의 고장이라는 명성을 공고히 하였다.

1) 풍부한 인력과 수공업 발달

예로부터 강화 사람들은 빼어난 손재주로 유명했던 까닭에, 화문석이나 가마니 짜기와 같은 수공업이 발달할 수 있었다. 화문석의 경우 직물산업이 발전하기 이전부터 강화의 특산품이었다.

화문석은 해외에서 열리는 공진회와 박람회에 빠짐없이 출품되어 명성을 떨쳤으며,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완초(莞草)에 청, , , , 흑을 염색하여 모양이 보기 좋았으므로, 우리나라에서 화문석은 혼인, 연회와 같은 의례에서 사용되었다. 서양인들은 그림처럼 서재나 응접실에 걸어두었다고 한다.

이러한 손재주는 정교함과 꼼꼼함이 요구되는 소창의 제작과정에 적합했다. 더욱이 농사로만 생계유지는 힘들었던 터라, 부업수단으로 소창을 짜서 팔았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소창의 제작은 여자들이 주로 전담했는데, 여기에서 남경여직(男耕女織)이라는 단어가 파생되었다.

조합 검사실에서 검사하는 모습<출처:인천관광공사,강화이야기 아카이빙,2018,214~217쪽>

2) 개량직기의 도입과 공동작업장 운영

강화에서 소창 산업이 발달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기계식 직기의 적극적인 도입으로 생산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어서였다. 족답기에서 기계식 직기로의 변환에 앞장섰던 인물은 하점면에서 활동한 김동식(金東植)이었다.

지역유지였던 그는 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에 힘쓰고, 산업조합을 설립하여 실업에 관심을 두는 등 다방면에서 활약하였다. 직물산업에 관심을 가진 그는 강화에 기계식 직조기를 보급하였으며, 하점 직물조합장으로 활약하였다.

김동식을 시작으로 사람들은 직기 개량에 관심을 갖고 새로운 직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1918년을 기준으로 강화는 재래직기가 약 2,600, 개량직기는 약 400대 있었다.

보급 초기 개량직기가 이미 전체 직기의 약 15.3 퍼센트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강화의 직물 산업이 기계화 단계로 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직기의 기계화로 효율성이 높아지면서 가정에서의 소규모 부업은 점차 산업화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직물 제조를 통제, 관리하기 위한 조합이 설립되고 공동작업장이 만들어졌다. 작업방식도 분업화되어 염색과 정경(整經)을 할 수 있는 공장을 따로 설계하는 등 체계화되었다.

강화산업조합에서는 제품 검사실을 증축한 후 품질검사를 통해 상품으로서의 가치를 높이고 표준화·규격화하여 간상(奸商)들의 농단을 방지하고자 했다. 이렇게 전문화·분업화된 조직은 조양방직회사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1935년 홍재묵(洪在默홍재용(洪在龍) 형제가 조양방직 주식회사를 설립, 기계를 이용한 근대식 방식으로 직물을 생산했다. 조양방직을 시작으로 심도직물, 십자당, 이화직물 등의 공장이 차례차례 들어섰고, 이 공장들이 직물산업의 발전을 선도했다.

공장들의 증가와 성공적인 기계화 변환으로 말미암아, 강화는 직물의 고장이라는 타이틀을 얻게 된다.

 

3) 판로(販路)의 확대

마지막으로 소창산업이 발달할 수 있었던 것은 상품의 판매량도 높았을 뿐더러, 물건을 팔기 위한 행상이 구조적으로 완비되었다는 점이다. 특히 바다와 인접해 있는 지리적 이점으로 인해, 판매는 수월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다음은 당시 대규모 행상의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다.

소화 10(1935)에 있어서 섬 내로부터 행상으로 나간 사람 수는 남자 848, 여자 2,133, 합계 2,981명에 이르고 이들의 남녀 인수에서 한 단체를 만들어 많은 것은 20인 정도가 하나의 그룹이 되고 행선은 전 조선에 이르는 곳에 달하여 멀리 간도지방에까지 이르러 있다.

파는 방법은 먼저 근거지에 숙소를 정하고 짐을 놓고 각 판매자(주로 여자)는 매일 부근에 가정을 방문하여 팔아치운다. 그것도 현금 팔이는 거의 없고, 대부분은 괘매(掛賣, 외상)이다.

대체로 행상은 부부로 조직되었다. 남자는 사랑방으로 가서 남자에게 팔고, 여자는 가내(家內)에 침투하여 주부들에게 판매했다. 활동 시기는 봄, 가을이었는데, 조직 내 질서와 규율을 세워 각 상인들마다 다툼이나 경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판매범위는 점차 확장 되어, 조선 전국에 이어 만주는 물론 북중국까지 판로(販路)가 확장되었다.

행상의 상로(商路)는 정기적으로 확립되어 있었기에, 대량주문·판매하는 방식이 발달할 수 있었다. 상품 가격은 행상의 역량에 따라 책정되어, 한번 물건을 팔고나면 상당한 현금이 확보되었다. 우천시에는 숙박비와 여비까지 매주(賣主, 사장)가 지급해줄 정도였다.

지리적 이점은 물론이고 상품 판매까지 조직적인 체계가 적용되었기 때문에, 강화의 직물 산업은 외부로 진출하는 데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있었다.

소창체험관(강화)<출처:국립민속박물관>

3. 해방 이후 강화직물의 발전

해방 후에도 강화의 직물산업은 상승세였다. 1960년대 강화의 직물산업을 주도했던 곳은 심도직물이었다. 이 회사는 양단(고급비단), 커튼, 카펫, 치마, 웸브리넥타이를 주로 생산했고, 공장건물만 32개에 대지 3,500평이었다. 그 외 사무실, 공장, 식당, 창고, 기숙사, 기계설비실 등을 현대식으로 갖추고 있었다.

월급이 많은 편이어서 미혼 여성들이 선망하던 곳이었으며, 전성기에는 1,000명이 넘는 인원이 일했다. 이외에도 1976년 이화견직, 조양방직, 경도직물, 남화견직, 평화견직, 동광직물, 경화방직 등 15개의 회사가 있었고, 기사(技師)를 포함하여 종업원 수는 1,000명이 넘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른 후 직물산업은 두 차례의 석유파동과 정부의 합리화 정책 영향으로 말미암아 쇠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1970년대 중반에는 생산액이 대구에 밀리게 된 데다가, 나일론의 등장과 일회용 기저귀의 사용으로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그 결과 직물을 짜는 사람들의 숫자는 점차 줄어들어 결국 사양산업의 길을 걷게 되었다.

2000년대 들어서 강화의 직물산업을 부흥시키려는 노력이 시작되었다. 강화의 상징이자 지역경제에 큰 영향을 끼친 심도직물 회사의 기념관을 짓기 위한 시도가 있었던 한편, 친환경적인 소창으로 만든 손수건과 행주를 강화도의 대표 관광상품으로 홍보하고 있다.

2018년 강화군은 올해의 관광도시로 선정된 바 있었는데, 이를 계기로 1956년 설립되었던 평화직물 공장을 매입하여 직물산업을 재조명하고 교육체험을 할 수 있도록 조성하였다.

현재 이 공장은 관광객들에게 전통문화유산을 홍보하면서, 소창 관련 전문인력을 양성하는 한편 관광플랫폼과 연계하여 관광 중심지로 널리 알리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이병훈씨와 공장내부(강화, 은하직물)<출처:국립민속박물관>

4. 소창의 현주소와 해결방안

이렇게 직물의 고장이라는 옛 명성을 다시 회복하고자 하는 여러 시도가 있었으나, 아직 강화의 소창공장이 직면하고 있는 어려움은 현실적으로 적지 않다.

현재 소창공장이 처한 현실은 다음과 같다. 직물공장의 운영은 한 쌍의 부부 중심으로 가동되고 있으며, 직원은 1~4명이거나 아예 없는 경우도 있다. 보통 1인이 돌릴 수 있는 기계가 약 3대인데, 현장에서 한 사람당 돌리는 기계는 6대 정도이다.

역직기를 돌리는 것뿐만 아니라 가공, 검단, 건조 등의 과정도 거쳐야하기 때문에 개인에게 돌아가는 노동량이 과도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용할 직원이 거의 없다는 것은 안정적인 인력 수급과 확보가 부족하다는 점을 의미한다. 이는 열악한 소창 산업현장의 근본적인 문제라 할 수 있다.

소창 관련 기술을 습득하려는 사람이 없는데다가, 단순 근로자로 일하는 것마저 기피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 점은 세대 간의 기술단절을 가져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소창의 역사적·문화적 가치를 생각해서라도 해결되어야 할 문제다.

정경기 모습(은하직물)<출처:국립민속박물관>

게다가 소창은 표준화·규격화 부분에서 통일되어 있지 않아서 공장의 업자마다 바디나 올수가 다르다. 1924년 직물의 폭과 너비가 제각각이라 중간상인이 이를 속임수를 써서 파는 경우가 생겼기에 직물검사를 개최하여 이를 예방했다는 기록도 있다.

개인의 노하우에 의해 자유롭게 생산된다는 측면도 있지만, 이를 악용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대안을 제시해야 된다.

다음으로 공장 조합원들의 내적인 역할론의 부재가 있다. 1976강화군 면(소창) 직물업자 친목회가 결성되었지만 수익성 향상에 주력할 뿐, 소창의 존속과 지속성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이 결여되어 있다.

소창에 닥친 난관은 개인 혼자로서는 타개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개인보다는 협회나 단체 측면에서 장기적인 대안을 수립해야 한다.

소창으로 만든 상품들(강화소창이야기, 메인드인 강화)<출처: 국립민속박물관, 메이드인 강화>

마지막으로, 면사의 원료구입과 생산품 판매에 대한 판로(販路) 확보에 대한 문제이다. 현재 소창을 직조하는데 쓰이는 면사는 부산의 업체에서 수입해서 사용한다. 익히 알다시피 독과점 구조는 구입가격이 변동될 불안정성이 있다. 게다가 중간상인이 유통 경로를 장악하고 있는터라, 소창공장에서 직접 제작된 고유상품을 붙일 수 없는 일방적인 판매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를 위한 내적인 해결방안으로는 소창 제조업자들의 조직화 및 품질 관리, 그리고 지속적인 교육에 대한 체계 구축, 소비자들의 기호 파악, 직물공장 가동에 관한 획기적 전환 등이 필요하다. 외적인 해결방안으로는 소창 개발업자 사이의 네트워크를 구축해서 제2의 생산품으로 재창출 되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상품개발업자와 직물공장이 참여하는 단체의 결성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직물공장의 발전을 위한 법적인 기반 강화와 행·재정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소창은 근·현대 시기 우리 일상생활과 100여 년을 함께한 생활재다. 건강하고 친환경적인 생활 용품에 관심이 급증한 요즘, 소창을 다시 일상생활화 할 수 있는 충분한 기회와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관계자들의 많은 관심과 충분한 노력이 있다면, 소창은 역사상의 유물로만 남지 않을 것임을 확신한다

이 글의 1장과 4장은 강화의 직물, 소창(국립민속박물관, 2019)의 내용을 참고하여 작성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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