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조 야도(野都) 강화를 아십니까?
원조 야도(野都) 강화를 아십니까?
  • 김세라
  • 승인 2019.09.06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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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운 前 경기도 의원 인터뷰

 

 

사진  김세라 기자
사진 김세라 기자

 

지난 7, 일본정부의 대한민국 수출규제와 안보상 우호국가로 우대하던 백색국가에서 한국을 제외한다는 방침을 밝히면서 ‘NO 아베운동이 전개됐습니다. 대법원의 일제 징용배상에 대한 일본의 보복으로부터 촉발된 불매운동은 여름 내내 한반도를 뜨겁게 달궜습니다. 최근에는 강화의 시민단체들이 뜻을 모아 독립운동은 못해도 불매운동은 한다.’는 플래카드를 곳곳에 걸어 눈길을 끌었는데요, 우리사회의 모순에 맞서 싸우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강화인의 모습을 기억하고 계신 한상운 경기도 의원께 저항의 강화 근현대사를 물었습니다.

 

강화뉴스(이하 강화) 요즘 한일관계 때문에 세상이 참 어수선 합니다.

한상운 의원 (이하 한 의원) 세상은 맨날 혼란했어요. 제가 1943년생인데요, 일제 강점기, 해방, 한국전쟁, 이승만 독재와 4.19, 군부독재 정권, 민주화 운동까지... 우리 근현대사는 항상 진보와 반동의 반복이었죠. 그런 가운데 역사는 발전해왔습니다. 고 김대중 대통령께서도 역사는 진보하고 인생은 아름답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런 점에서 우리 민족은 정말 대단한 민족인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강화 의원님 고향은 어디신가요?

한 의원 원래 본가는 남산리인데 태어난 곳은 만주국 목단강시입니다. 해방 후 할아버지가 계신 남산리로 돌아왔죠. 어머니는 냉정리 분이셨어요. 만주에서 돌아와 인천의 서흥초등학교를 잠깐 다니다가 합일학교로 왔어요. 제가 합일학교 2학년 때 한국전쟁이 발발했습니다.그후 강화중, 강화고를 다녔어요. 제가 고등학생일 때 4.19가 일어났습니다.

 

강화 의원님은 요즘 말로 하면 시민운동가라고 하실 수 있을 텐데요, 4.19 때 활약이 대단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한 의원 그때 제가 강화고등학교 규율부장이였어요. 제가 고등학교때 보디빌딩, 그때는 육체미라고 했는데 그걸 했어요. 규율부장은 학생회장과 함께 학생들에게 꽤 영향력이 있었습니다. 아시는 것처럼 강화는 양명학의 뿌리가 깊게 있는 곳 아닙니까? 양명학의 정신은 지행합일이거든요. 양명학 때문인지 강화는 예로부터 강골 기질이 있었어요. 제가 어릴 적에어른들이 강화를 일컬어 제2의 모스크바라고 할 정도로 진보적인 성향이 강한 곳이었어요. 실제로 강화는 원조 야도(野都)였습니다. 3.18 만세운동이 있었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몽골에 항전했던 삼별초의 전통도 있잖아요. 뭐든 한번 덤비면 화끈하게 싸웠던 지역입니다. 4.19 때 강화고등학교에는 이영성 선생님, 남궁택 선생님 같은 깨어있는 지식인들이 계셨습니다. 이분들이 우리에게 좋은 귀감이 되었거든요. 당시 서울에서 이승만 독재에 맞서서 학생들이 싸우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선생님들께서 그러시더군요. ‘자식들아, 공부를 못하면 데모라도 나가야지!’ 선생님들의 격려를 받으며 강화중학교, 강화여중, 그때는 여상이라고 했어요. 강화여고 학생들 모두 나오니 한 천명 정도가 되는 인원들이 강화읍을 돌아다니면서 이승만 하야하라!’를 외쳤습니다. 아마 그때 이후로 시민운동이나 정치계에 관심을 두게 된 계기가 되었던 것이죠..

 

강화 지금의 강화와는 분위기가 많이 달랐네요.

한 의원 강화는 일제강점기 시절에도 일본사람들이 여관하나 상점 하나 내지 못한 동네에요. 얼마 전 강화뉴스에서도 칼럼을 썼던데, 일본 불매운동의 원조도 강화 아닙니까. 갑곶에서 인천으로 가는 정기노선을 운영했던 동양기선, 삼신기선은 강화사람들이 만든 회사였죠. 어느 날 일본인 다나카란 사람이 운임비도 저렴하고 속도도 빠른 기선을 띄웁니다. 수건이 귀하던 시절이었는데, 배를 타면 사은품으로 수건까지 줬다고 하더군요. 합일초 교장이었던 최상현 선생이 강화사람들에게 당장의 작은 이익에 현혹되지 말자고 설득하셨고, 강화 사람들은 현명하게도 불편함을 감내하고 우리나라 배를 이용했다고 합니다. 그 덕에 강화에는 일본인 사업가는 발도 못 붙였다고 하죠. 다른 지역과 달리 해방 이후 일본인이 소유했던 적산가옥이 거의 없었던 곳이 강화입니다. 그만큼 강화는 일제의 경제침탈을 막아낸 아주 드문 지역 중 하나입니다.

 

강화 일제에 예속되지 않겠다는 강화사람들의 주인의식에 감복하게 됩니다.

한 의원 일제는 강화 사람들의 민족의식을 없애려고 치사한 짓도 많이 합니다. 한반도의 맥을 끊으려 국토 곳곳에 쇠말뚝을 박았다고 하잖아요. 강화의 명산에도 그 짓을 했죠. 아마 해발고도나 좌표를 표시한다는 이유였지만 지금도 그 말뚝이 박혀있을지 몰라요.

또 지명도 멋대로 변경합니다. 강화는 고려의 도읍지잖아요. 고려 왕실이 개성에서 강화로 옮겨올 때, 이름도 가져 옵니다. 그래서 강화에 고려산이 있는 거죠. 원래 강화읍에 있는 북산은 송악산이었어요. 북산 넘어가면 지금도 송악정이 있잖아요. 그걸 일제가 행정구역 개편할 때 북산으로 바꿔버려요. 화산이라는 이름을 지금의 남산으로 바꿔버리구요.

이 뿐이 아닙니다. 오련지 설화가 전해지는 고려산 자락에 위치한 청련사의 다른 이름은 국정사(國淨寺)에요. 1696년에 편찬된 강도지에 보면 고려산에는 홍릉(洪陵)과 국정(國淨), 적석(積石), 백련(白蓮) 등의 세 개의 절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거든요. 나라를 맑고 깨끗하게 정화시킨다는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국정사는 원래 몽골군의 침략을 물리치고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는 왕실기도 사찰이었어요. 국정사가 있던 이 지역은 국정동천이라고 했고요. 그런데 일제는 1914년에 동네이름을 국화 국()자를 써서 국화리로 이름을 바꿔 버립니다.

흥왕(興旺)리는 원래 임금 왕()을 썼었는데, 일본놈들이 그 앞에 날일을 갖다 붙여서 지금의 흥왕(興旺)리로 바뀐 겁니다. 하점면 부근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임금 을 써서 원래는 부군리였는데 일제가 부근리로 바꿔버린 겁니다. 이런 지명들도 언젠가는 다시 바뀌어야 할 겁니다.

강화 일제는 참으로 꼼꼼하게 민족정신말살 정책을 폈네요.

한 의원 3.18 만세운동은 2만 명이 참가한 전국에서 가장 큰 규모의 항쟁 아닙니까. 강화사람들은 그 어떤 탄압에도 굴복하지 않았던 위대한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해방 이후도 강화에는 진보적인 인사들이 제헌의원으로 당선됩니다. 해방후 초대 화도면장이었던 염파 윤재근 선생이 무소속으로 출마해서 제헌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후 2,4,5대 국회의원을 지냅니다. 그리고 8,10,11대 국회의원이었언 오홍석 의원 모두 야권 계열의 국회의원이었습니다. 제가 정계에 뛰어들게 된 것은 이 분들과 함께 활동했기 때문입니다. 죽산 조봉암 선생도 강화 출신 아닙니까. 그분은 강화출신으로 3.18만세운동을 통해 민족의식을 갖게 되고, 일제시대에는 사회주의 운동의 지도자로, 해방이후에는 제헌의원이면서 초대 농림부장관으로 대한민국을 만드는데 큰 역할을 하셨던 분이죠.

 

강화 의원님 덕분에 잘 몰랐던 강화의 근현대사를 알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강화뉴스 독자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한 의원 13대 국회 전까지 강화는 보수보다는 진보라는 단어가 어울렸던 야당의 도시였습니다. 강화의 바울이었던 성재 이동휘 선생, 죽산 조봉암 선생 모두 사회주의계열 독립투사였잖아요. 길상면의 초대면장 황도문 선생도 3.18 만세운동의 핵심 인물이었죠. 강화의 사상문화사가 퇴색되어 이런 자랑스러운 역사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민족의식이 강하고 불의에 항거하길 두려워하지 않았던 선조들의 모습을 본받아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본상품 불매운동은 물론, 정의로운 세상을 만드는데 앞장서는 강화사람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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