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걸 의원 강연 3 -우당 이회영과 신흥무관학교, 그리고 강화학파
이종걸 의원 강연 3 -우당 이회영과 신흥무관학교, 그리고 강화학파
  • 인터넷 강화뉴스
  • 승인 2019.08.10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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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는 8월 1일(목) 6차 월례강좌로 더불어민주당 이종걸 의원의 강연을 들었습니다. 이종걸 의원은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 우당 이회영 선생의 손자로 북경, 만주, 연해주 일대의 독립투쟁 현장을 답사하여 '다시 그 경계에 서다.'라는책을 펴낸 바 있습니다.
과거사를 반성하지 않는 후안무치한 일본의 경제침략에 맞서서 온국민이 마음을 모으고 있는 이때, 100여 년 전 대한 독립을 위해 삶의 전부를 고스란히 바쳤던 선각자의 삶을 돌아보면서 오늘을 사는 길을 다시묻습니다. 강연내용이 길어 3회로 나누어 연재합니다.

 

2.8 독립선언, 무오 독립선언, 3.1독립선언

3대 독립선언서 원본
3대 독립선언서 원본

2.8독립선언서, 3.1독립선언서는 그냥 선언서입니다. 유일하게 무오독립선언만이 대한독립선언서라고 딱 명명합니다. 조선독립선언으로 할 것인지, 대한독립선언으로 할 것인지 토론 끝에 대한독립선언으로 한 것인데, 무오독립선언은 독립운동의 모든 방략을 그대로 싣고 있습니다. 무장혈투가 나라를 되찾는 길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참여한 사람은 39명인데 이승만, 안창호도 있지만 실제로 무장투쟁을 하신 분들이 주축을 이루었습니다. 1/3 정도가 신흥무관학교 출신입니다. 이동녕, 김동삼,이시영,이회영 등 10여년 동안 무장혈투에 잔뼈가 굵은 최고의 항일운동가들이 토론을 하고 그걸 조소앙 선생이 집약하여 선언서를 작성했습니다.

조소앙 선생의 문장은 이광수, 최남선에 못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앞의 두 선언서에 비해 훨씬 더 선명하고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명문입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앞의 두 선언서에 비해 무오독립선언은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이걸 보면서 역사 서술의 주체와 운동 주체의 불일치가 있다고 보여지고, 우리나라가 아직 가야할 길이 멀구나라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무오독립선언의 내용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임시헌장으로 이어집니다. 국호는 대한민국으로 하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 규정합니다. 그때 신채호 선생은 고려공화국이라 하자, 대한민국은 대한제국에서 나온 말인데 망한 나라의 이름을 왜 쓰냐고 가장 통일에 가까웠던 것이 고려이니 고려공화국으로 쓰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대한민국으로 결정합니다. 이걸 보면 우리 선조들의 조심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선조들은 항상 중간을 택합니다. 이승만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총리로 정합니다. 이승만의 본질을 누가 몰랐겠습니까? 당시 큰 어른이고, 지도자였던 석주 이상룡이 아닌 이승만을 택한 것을 보면 우리나라 지도자의 생각들은 아주 면밀하고 현실성이 높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날카로운 일은 안했고 이런 조심성이 피부에 와닿습니다.

대한민국을 지금까지 쓰고 있는데 이것이 우리의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일어난 일본의 경제전쟁을 보면서, 신자유주의시대에 이런 제국주의 침략을 받고도 참아낼 수 있나. 국민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는데 냉정하게 상황을 보면서 선조들이라면 어떻게 했을까하고 항상 생각합니다. 만주 벌판에서 고생하고 죽음을 당하면서, 그분들이 눈을 반짝이면서 '저쪽이라면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떻게 할 것인가'를 짐작하면서 정세를 분석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 선조들을 기억하게 됩니다.

 

통일된 국가를 염원한 선각자들

육군사관학교 정문 동상들
육군사관학교 정문 동상들

지금은 영토도 있고, 적들이 쳐들어오면 피할 장소도 있으나 그때는 일본군들이 총들고 들어오면 다 죽는 판입니다. 그래서 살아남으려면, 독립의 끈을 이어가려면 국제정세를 살피고, 동향을 관찰하면서 민감하게 반응했습니다.

당시 모스크바에서 열린 약소국회의 동영상이 최근 공개되었는데, 거기에 우당 이회영 선생, 조소앙, 홍범도 장군의 모습이 나옵니다국제 정세에 민감하고, 국제적인 연대와 네트워크를 끊임없이 활용하는 모습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아나키스트들은 러시아에서 한인 사회주의자의 행동에 대해 실망을 느꼈던 것 같아요. 저의 큰아버지 이규창 선생은 1933년에 잡혀서 광주교도소에 수감되었는데요. 광주교도소에서 박헌영과 같이 있으면서 삐라 만들어 뿌리고 징벌방에 갇히기도 했다는데 그들은 아나키스트인 우리하고는 달랐어라고 말하더군요. 그 안에 있었던 일을 <운명의 여진>이라는 책으로 썼는데, 쉬운 한글말로 바꿔서 출판하려고 합니다.

그분이 45년 해방되고 나서 감옥에 나오니 노덕술이 집을 지키더라는 겁니다. 몇십년 감옥살이하고 나왔는데, 옛날에 나를 잡으러 다니던 놈들이 또 나를 잡으러 오는구나면서 갈길이 멀다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김구선생도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의거 이후 거의 도망다니며 살았습니다. 장강의 뱃사공 품에서 3년을 숨어 지내기도 했을 정도였는데, 그런 분이 해방된 조국에 와서 죽은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백범의 암살은 처음이 아니라 마지막이다, 백범의 죽음으로 우리 사회는 완전히 친일사회로 복원된 것입니다.

근데 그 나라가 결국 어려움을 이겨내고 친일을 응징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전세계적으로 흔치않은 나라이죠. 정말 우리 사회는 간단치 않은 사회입니다.

일본제국주의의 마지막 총독 아베 노부스케가 패망하고 일본으로 돌아갈 때 우리는 분명히 다시 돌아온다고 했다지 않습니까. 그 근거가 무엇이겠습니까? 일본이 1944년 전세가 악화되고 패색이 짙어지자 일년동안 국채 발행을 엄청나게 합니다. 1945년에는 거의 일년 예산 수준으로 국채를 발행해서 그걸 나눠줍니다. 내가 돌아올 때 힘이 되고 약이 될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내가 돌아올 때 생기는 힘이 바로 국채발행, 즉 돈이잖아요. 그리고 맥아더 포고령에 의해 아베의 이 말이 지켜졌고, 감옥에서 나왔던 사람들이 다시 들어가고, 일본을 해하는 사람은 우리가 사살한다는 맥아더 포고령으로 그때 사람들이 어? 다시 일본시대가 오는구나하고 어리둥절했던 것이죠. 그리고 몇 년 후 미군정에 의해 우리는 완전한 일본체제로 복귀하고 맙니다. 일본 대학 나온 사람이 출세하는 그런 친일사회가 되어버린 겁니다.

백범과 그시대 선각자의 발언이나 선언문을 보면 독립보다는 하나의 국가가 더 급했습니다. 분단된 국가는 우리의 죽음이다. 분단되면 저들의 세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독립의 선결조건은 하나의 국가였던 것이죠. 그때 국제정세라든지 모든 면에서 분단이라는 것은 우리 민족을 해하는 것이다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당시 독일은 동서로, 발칸반도와 중국, 베트남 모두 분단 되었습니다. 유행같은 분단의 늪에서 우리는 독립을 위해서는 하나의 국가가 필요했다고 외친 것이죠. 우리는 실제로 분단으로 전쟁을 겪었고, 친일과 냉전 속에서 시달렸습니다.

그렇게 보면 결국 지금의 일본을 이겨내는 선결과제는 무엇보다 평화적인 통일입니다. 하나의 국가로 가야하는 것이죠. 그것이 바로 대한독립을 외쳤던 선각자들이 우리에게 남긴 최대의 과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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