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걸 의원 강연 2 -우당 이회영과 신흥무관학교, 그리고 강화학파
이종걸 의원 강연 2 -우당 이회영과 신흥무관학교, 그리고 강화학파
  • 인터넷 강화뉴스
  • 승인 2019.08.10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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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는 8월 1일(목) 6차 월례강좌로 더불어민주당 이종걸 의원의 강연을 들었습니다. 이종걸 의원은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 우당 이회영 선생의 손자로 북경, 만주, 연해주 일대의 독립투쟁 현장을 답사하여 '다시 그 경계에 서다.'라는 책을 펴낸 바 있습니다.
과거사를 반성하지 않는 후안무치한 일본의 경제침략에 맞서서 온국민이 마음을 모으고 있는 이때, 100여 년 전 대한 독립을 위해 삶의 전부를 고스란히 바쳤던 선각자의 삶을 돌아보면서 오늘을 사는 길을 다시묻습니다. 강연내용이 길어 3회로 나누어 연재합니다.

 

 

죽음, 밀정, 암살

이종걸 의원 강연 모습 (김최영 제공)
이종걸 의원 강연 모습 (김최영 제공)

이건승, 정원하, 홍승헌 선생은 모두 병들어 돌아가시는데 구체적인 내용은 잘 모릅니다. 대부분 횡도촌에서 돌아가셨는데, 함께 망명하셨던 다른 분들은 절반은 신흥무관학교에서 활동하다가, 나머지는 병으로 돌아가십니다.

저희 이은숙 할머니가 쓰신 <서간도시종기>를 보면 자세히 나와 있어요. 제가 어렸을 때 아버님이 할머니한테 화선지를 주시면서 생각나는 대로 쓰시라고 해서 만들어진 책입니다. 내용을 보면 가군(家君. 우당 이회영)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거나 하는 구절처럼 한자와 언문이 섞인 것이라 너무 어려워서 한 장 보는데 한 시간씩 걸렸습니다.

서간도 시종기는 신흥무관학교 등의 활동을 부인이 보는 입장에서 쓰셨습니다.

내용을 보면 돌아가신 분들은 행방불명이거나 병들어 죽습니다. 경재 이건승 선생도 1924년에 병으로 돌아가시는데 할머니 책에 나온 분위기를 보면 이렇습니다. 독립운동 하겠다고 모시적삼에 한복입고 오셨던, 경세와 지략이 뛰어나신 분이지만 그냥 농사꾼이 되어 매해 농사만 짓고 삽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조직하는 것이 얼마나 힘듭니까. 독립운동을 하려고 해도 그게 말처럼 쉽지 않은 거죠. 게다가 중국이 통제가 잘 안되니까 마적 떼들이 창궐해서 막 약탈하고 그럽니다. 그래서 조선인들을 보호할 민정조직도 만들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또 나이든 망명객들은 변화된 풍토와 싸우시다가 조금만 상처가 나도 파상풍, 즉 염증으로 돌아가십니다. 기록에 보면 한 분이 병이 나면 들쳐 업고 200리를 가야 의원을 볼 수 있어요. 이처럼 병마와 싸운 모습들이 거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당 이회영 선생의 둘째 형님이 이석영인데 북경에 살고 있었어요. 이회영 선생이 아나키스트로 1932년 관동군 무토사령관을 잡겠다고 만주 대련으로 왔을 때, 북경에 있는 둘째형님을 뵙고갑니다. 둘째 형 이석영은 재산이 많았습니다. 명동에 당신 땅도 있었지만, 본인이 양자로 가서 받은 땅이 어마어마하게 많았습니다. 양주 지역, 지금으로 치면 남양주,구리, 서울 일부를 포함하는데, 지금 남양주 땅이 거의 이석영 땅이었다고 합니다. 300만평 정도 되었다고 해요.

그런 거부였는데 북경에서 굶어서 죽습니다. 그 분의 아들이 둘 있는데 우리 가족사에서 가슴아픈 사연입니다. 첫째 아들은 이규준이란 분으로 가족 대소사를 챙기던 좋은 아저씨였답니다. 일가가 아프면 데리고 가서 치료하고, 동생 봐주고, 마음착한 아저씨인데, 그분은 다물단 단장이었습니다. 다물단은 밀정을 가려내고 처단하던 단체입니다.

그때 밀정이 너무 많았거든요. 밀정이 하나 있으면 그 지역이 초토화되기 때문에 밀정을 가려내고 처단하는 일이 중요했는데 그 일을 다물단이 한겁니다. 다물단 단장이 이석영의 첫째 아들 이규준 선생이었는데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알 수 없어요.

서간도 시종기
서간도 시종기

저는 만주에서 펼친 독립운동 키워드는 밀정과 암살 두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지난번에 육군사관학교가 정문에 다섯 분의 동상을 세웠습니다. 우당 이회영 선생도 들어가 있죠. 그때 교장께서 우리는 총알도 있고 막사도 있고 총도 있는데, 이분들은 그것도 없이 기개로 싸웠다.”고 말했지만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우리는 전선이 있는데 그때는 전선이 없었습니다. 총알이 어디서 어디로 날아올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밀정에 의해 옆이나 뒤에서 날아올지 모르는 상황으로 그분들은 전선없는 전쟁을 치루었던 것입니다.”

우당 이회영 선생은 193211월 둘째 형님에게 하직인사하고, 지하 공작망을 조직하고, 무토 일본군사령관 암살을 준비하기 위해 대련으로 갔으나 항구에서 체포되어 1117일 여순감옥에서 옥사합니다.

그런데 대련항에서 체포되었던 것은 이석영의 둘째아들인 이규서의 밀고에 의해서입니다. 나중에 다물단에 의해 척결될 때 스스로 실토했습니다.

1932년 홍커우 공원에서 일본의 천장절 행사 때 윤봉길 의사가 물통, 도시락 폭탄으로 일본군 시라가와 총사령관을 척살합니다. 그런데 그때 척살조로 들어간 것이 김구 선생의 애국단, 윤봉길 의사이고, 또 한 팀이 신흥무관학교 출신인 아나키스트들이 조직한 남화한인청년연맹입니다. 남화연맹에서는 명사수로 알려진 백정기 선생을 파견합니다. 백정기 선생은 윤봉길의사의 성공 이후 빈손으로 돌아섰다가 이듬해인 1933년 상해에서 일본 주중대사 암살을 모의했습니다만 역시 밀정의 밀고로 체포되어 순국합니다.

시게미쓰가 항복문서 서명하는 모습
시게미쓰가 항복문서 서명하는 모습

옆 사진은 미해군 군함 미주리호에서 이루어진 항복문서 조인식입니다. 영화<암살>의 첫 장면에 나옵니다. 미국이 촬영한 영상에 보면 일본측에서 한사람이 절뚝거리며 나와서 서명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이 자가 바로 윤봉길 의사가 던진 폭탄에 의해 다리를 잃은 당시 일본 주중공사 시게마쓰입니다. 저는 그래서 이 장면을 볼때마다 마치 윤봉길의사가 이자의 목덜미를 쥐고 걸어가는 모습을 연상하게 됩니다. 우리 교과서에서는 알려주지 않는 일화이지요.

당시 상황을 돌아보면 밀정이 너무 많으니까 척살조로 파견될 분은 입이 천금처럼 무거운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윤봉길 의사가 그랬고, 백정기 선생이 그랬습니다. 백범과 우당은 비밀리에 서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 같아요.

우당 이회영 선생이 북경에서 둘째형님을 만나고 11월 만주 대련으로 이동하자, 그 때 항구에서 남루한 모습으로 변장한 이회영 선생이 바로 체포됩니다. 호위하러 나왔던 비밀결사대원이 보는 가운데 체포되어 바로 여순감옥으로 연행됩니다. 밀정이 밀고한 것이죠.

남화한인청년연맹에서 뒷조사를 해보니 밀고자가 이규서라는 것이 밝혀졌고, 바로 처단되었습니다. 조선 최대의 거부였으나 북경에서 굶어죽은 이석영 선생, 첫째 다물단 단장 이규준 둘째 밀정 이규서. 우리 가족사 중에 가장 가슴아픈 사연입니다.

고모님한테 제가 그랬어요. 고모님이 상세히 알고 있으니까 글을 쓰시라고 했는데, 그때마다 알았어. 알았어 하시면서 끝내 쓰시지 않았습니다. 직접 독립투쟁을 했던 분이기에 서간도시종기 이상가는 어마어마한 자료가 나올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당시 아나키스트들은 자기 기억을 지우는 기억술이 있었다고 해요.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자들을 보내서 주변관계를 말씀드리면 기억을 하실까 싶었지만 끝내는 기억을 못하는 건지 안하는 건지 말씀을 안하셨어요.

아나키스트들은 잡혀서 고문당하면 불 수밖에 없으니 그냥 기억을 지우는거죠. 그때 고문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래서 정보를 안불기 위해서는 바로 죽는게 제일 좋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당 선생이 체포된지 몇일 만에 돌아가셨다는게 이해가 됩니다. 할머니도 처음에는 글을 쓸까 말까 무척 고민하셨거든요. 당시 아나키스트들이 간직한 삶의 원칙과 태도들이 눈에 보이는 것처럼 선합니다.

아마 고모가 한마디 말도 없이 돌아가신 것은 아나키스트들이 겪어야 했던 암살과 밀정에 얽힌 수많은 이야기들을 그냥 자기가 안고 가는 것이 낫겠다라고 생각하신 거 같습니다.

이번에 신흥무관학교라는 뮤지컬을 올렸는데, 시나리오 작가와 상의하면서 아나키스트들의 투쟁원칙을 이런 가사로 정리해보았습니다.

우리는 기록을 남기지 않는다 우리는 이름을 남기지 않는다. 동지들의 꿈속에 남는다. 나의 가난한 유서에 내 이름 석 자는 없다. 그저 피로 쓴 여섯 글자 대한독립만세.”

신흥무관학교가 의열단이 만들어진 장소입니다. 신흥무관학교 핵심들은 대부분 의열단을 중심으로 아나키스트로 변하고 투쟁 과정에서 살아남은 분들이 광복군 2지대로 갑니다. 거기서 아이디어를 얻어 만든 가사입니다.

일본은 세계전략을 구상하면서 경찰 정보망을 가장 중요하게 취급했습니다.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당시 우리 독립운동가들은 일본 경찰 정보망에 상당히 노출되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래서인지 신흥무관학교는 기록이 별로 없습니다. 얼마전에 2.8독립선언 100주년을 맞아서 일본에서 토론회를 했는데 관계자가 말하기를 이 자리에 최소한 일본 정보과 형사가 5명은 와있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일본 경찰의 핵심은 정보이고, 이런 정보의 후예들이 지금 경찰을 이끌고 있습니다. 친일경찰 노덕술도 정보, 고등계형사입니다. 이들이 수많은 밀정을 심어놓습니다. 회유하고 포섭하면서 독립운동 진영을 초토화시키는 것이죠.

3500여명이 넘는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은 일본과 싸우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밀정, 밀정을 심은 일본과의 정보전을 펼칩니다. 아마 지금도 다르지 않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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