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걸 의원 강연 1 -우당 이회영과 신흥무관학교, 그리고 강화학파
이종걸 의원 강연 1 -우당 이회영과 신흥무관학교, 그리고 강화학파
  • 인터넷 강화뉴스
  • 승인 2019.08.09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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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는 8월 1일(목) 6차 월례강좌로 더불어민주당 이종걸 의원의 강연을 들었습니다. 이종걸 의원은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 우당 이회영 선생의 손자로 북경, 만주, 연해주 일대의 독립투쟁 현장을 답사하여 '다시 그 경계에 서다.'라는 책을 펴낸 바 있습니다.
과거사를 반성하지 않는 후안무치한 일본의 경제침략에 맞서서 온국민이 마음을 모으고 있는 이때, 100여 년 전 대한 독립을 위해 삶의 전부를 고스란히 바쳤던 선각자의 삶을 돌아보면서 오늘을 사는 길을 다시묻습니다. 강연내용이 길어 3회로 나누어 연재합니다.

 

 

 

매천 황현과 영재 이건창

이종걸 의원 강연 모습(김최영 제공)
이종걸 의원 강연 모습(김최영 제공)

 

19108, 한일합방으로 나라를 빼앗긴 것을 통분한 나머지 자결한 매천 황현은 자결하기 전에 강화의 영재 이건창 묘소를 찾아와 한 줄 시를 읇습니다.

 

     죽어서 외롭다고 서러워 말 것이 無痛悲獨臥(무통비독와)

     그대는 살아서도 혼자가 아니었던가, 在日已離群(재일이이군)

 

영재 이건창은 병인양요 때 자결한 사기 이시원의 손자인데, 영재와 절친했던 매천 황현도 그와 같은 최후를 선택합니다. 한일 강점에 이르러 죽는 사람 하나 없다면 앞으로 후대에 어떻게 얼굴을 들 수 있냐며 음독자살하는데, 매천의 죽음을 지켰던 동생 석전 황원도 해방되기 전에 저수지에 몸을 던져 죽습니다.

영재 이건창은 15세 진사과에 소년급제한 천재로 189847세에 돌아가시기 전까지 그 명성이 조선 천지에 알려진 인물입니다. 영재는 정말 뛰어난 분인데, 가만 보면 뛰어난 사람이 세상의 중심이 되는 것 같습니다. 강화에서 양명학의 흐름이 하곡 정제두에서 100여년이 지나 영재 이건창에 와서는 활짝 꽃을 피웠다고 할 수 있는데 몸이 약해서 47세의 나이로 요절합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영재 이건창은 초시나 대과에 합격한 신진기예들과 함께 마포 서강에서 나라를 걱정하고, 풍류와 낭만을 나누던 시회를 자주 열었습니다. 이곳에 영재의 소개로 매천이 참석하였답니다. 매천은 영재와 깊은 교유를 가지던 분이었는데 매천야록에 의하면 매천이 과거에 두 번이나 떨어졌는데 부정부패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해요. 그런데 영재 이건창이 심사관에게 말해서 공정하게 시험을 치르게 하여 그 다음해에 수석 합격했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매천이 영재 묘소를 다녀가고 나서 자결할 때쯤 영재 이건창의 아우인 경재 이건승과 강화학파 동료인 기당 정원하, 문원 홍승헌 선생이 망명을 떠납니다. 사촌동생인 난곡 이건방은 몸이 약하기도 했고, 양명학을 이어가야 해서 국내에 남습니다.

경재 이건승 선생이 만주, 횡도촌이라는 곳이죠. 거기로 떠날 때가 191010월인데 추웠다고 합니다. 제가 10여 년전 건평에 있는 이건창 선생 묘소를 찾아왔을 때가 11월 경인데 바람이 몹시 불더라구요.

이건승 선생은 홑바지 차림에 동네 마실가는 차림으로 나섰답니다. 그때 따라나선 이가 장조카 이범하, 영재 이건창의 큰 아들입니다. 횡도촌이 어딘지는 모르지만 작은아버지가 만주로 간다는 것을 알고, 이불을 갖고 따라갑니다. 그때는 이불이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물건이었거든요.

60년대인가 조선족인 일가 중 한 분이 어찌 어찌 한국에 왔는데 수레에 이불만 잔뜩 쌓아서 왔던 기억이 있어요. 지금에야 이불은 다 버리지만 그때는 이불이 제일 중요했던 모양입니다.

 

 

횡도촌, 경학사, 신흥무관학교

신흥무관학교 소재로 한 드라마, 뮤지컬
신흥무관학교 소재로 한 드라마, 뮤지컬

횡도촌에 망명한 선비들이 모여요. 석주 이상룡, 일송 김동삼, 신채호선생보다 훨씬 더 강력한 기개를 가진 의성 김씨 집안으로 임진왜란 당시 김성일 선생의 12대 손입니다. 또 석주 이상룡, 우당 이회영 이런 분들이 횡도촌으로 모이죠.

석주 이상룡과 백하 김대락은 처남매부지간인데 의병운동을 토대로 안동에서 신학문, 신교육을 도입했던 분인데 이분들이 약 150여명이 일시에 망명합니다. 우당 이회영 선생과 형제들 집안 70여명 정도도 압록강을 통해서 횡도촌으로 모이죠. 경재 이건승등 강화학파들도 마찬가지이구요.

그래서 횡도촌은 일시 조선 망명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던 곳입니다.

석주 이상룡 선생은 임청각을 다 팔고, 우당 이회영 선생 등이 재산을 팔아서 자금을 마련하여 모입니다.

신흥무관학교의 장소는 합니허라는 곳인데, 우당 이회영 선생이 중국의 원세개, 황제까지 되었던 사람인데 그가 주선해서 서간도에 약 100만평 정도 되는 땅을 빌립니다. 삼원보라는 곳인데요. 거기에 경학사라는 민정조직을 건설합니다.

아까 양명학의 기업 얘기를 했는데, 양명학이 성리학과 좀 다르게 현실적인 학문이라는 것이 단순한 철학보다 경제학, 경영학 우리로 따지면 실질, 물질과 관련된 것에도 개방적인 학문입니다. 대개 고루하다고 생각되는 성리학에 비해 양명학은 현실적인 방안을 제기하는 도구로서 역할을 했습니다.

강화학파가 양명학에 기초하고 있듯이 그때 모였던 석주 이상룡같은 고성 이씨 이분들도 사실 양명학에 뿌리를 두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우당 이회영 선생이나 진천의 보재 이상설 선생, 위당 정인보 이런 분들이 모두 양명학에 근거를 둔 분들이지요. 이분들이 상당한 토론을 통해서 만든 첫 작품이 바로 경학사입니다.

경학사는 민정단체인데 정치권력을 중심으로 조직하기 보다 오히려 경제적 부조단체, 사회적 경제에서 말하는 협동조합, 이런 조합들을 중심으로 하는 경제적으로 서로 도와주는 경제적 부조를 앞세우는 단체였습니다.

협동조합 도시로 유명한 스페인의 몬드라곤에 가보니까 , 경학사가 이랬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911년 만들어진 경학사는 바로 양명학에 기초를 둔 새로운 양명학적 민정단체인데 사실 자료가 별로 없어서인지 연구가 잘 안되어 있어요.

경학사가 강화학파가 새로운 철학과 경세적 사고를 현실에 적용시킨 사례라고 말할 수 있겠는데, 강화학파를 중심으로 한 양명학자들이 경학사를 중심으로 조직과 테제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 경학사의 학습기관으로 신흥강습소를 설치했는데, 이것이 신흥무관학교가 됩니다. 지금 이곳은 대부분 댐이 들어서고 많이 수몰되어 버렸습니다. 1911년 신흥강습소가 생기고 나서 약 10년 활동을 하다가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새로운 조직으로 전환된 계기가 1920년 청산리,봉오동 전투입니다.

내년이 청산리, 봉오동 전투 무장승리 100년이 되는 해인데, 그것을 기념하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청산리, 봉오동전투 지역도 수몰되어 아쉽습니다. 이번에 만주를 둘러보았는데 연변대가 옛날 사진을 웹으로 만들고, 또 체코에서 아카이빙을 하고 있는데 슬라브어로 된 자료가 많습니다. 거기 보니 체코가 건국되기 전에 러시아 혁명에 참여했던 보헤미안 부대가 무장이 뛰어났답니다. 이 부대가 스탈린에 막혀 트로츠키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블라디보스톡으로 옵니다.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의 노력으로 이들 무기의 일부가 청산리 전투에 투입됩니다. 정예 일본군 2개 연대가 중대급 부대에, 그것도 목총으로 훈련한 병사들한테 당할 수 있었냐고 의문을 품지만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의 기개가 대단했고, 거기에 체코의 신식무기가 제공되어 가능했다는 것이죠.

저희 이주숙 고모는 1910년생이신데, 태어나자마자 아버지 따라 만주로 가서 2010년에 돌아가셨습니다. 100세 되던 해 수원의 조그만 저수지에 붙어있는 초코파이 파는 가게를 운영하던 아들 품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지금도 고모만 생각하면 가슴이 싸합니다.

고모님 말씀이 자기는 무기를 몸 양쪽으로 지니고 열 번도 넘게, 수없이 왔다갔다하면서 무기를 날랐다고 해요. 그때 무기를 부녀자들이 가락지를 팔아서 무기 사는데 보태고, 또 돈을 모아서 부산까지 가서 무기를 구입했답니다. 기관총은 분해해서 쌀 뒤주에 숨겨서 이동했다고 해요. 이렇게 해서 무기를 신흥무관학교 학생 모두에게 제공했는데 2개 중대 병력에 16개의 기관총이 있었다고 해요..

그런데 일본군은 이런 사정을 전혀 몰랐고, 또 전술적으로 협곡으로 몰리면서 처참한 패배를 당한 겁니다. 나는 호랑이라는 별명이 있는 홍범도 장군의 전술이 먹힌 것인데 내년 무장 승리 100년을 맞이해서 확실한 고증이 더 필요하리라 봅니다.

청산리, 봉오동 전투에서 승리하고 나자 일본군이 추격에 나서면서 병력이 분산되고 많이 희생을 당합니다. 만주 일대가 초토화되는데 그때 죽은 조선인이 수십만에 이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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