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사람이 잊어버린 강화의 은인(恩人), 성재 이동휘 7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
강화사람이 잊어버린 강화의 은인(恩人), 성재 이동휘 7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
  • 박흥열
  • 승인 2019.07.11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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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의 독립운동가 선정 소식 아무도 몰라
강화군에서 관심가져야 할 독립운동가 중 1인

 

대한민국 국가보훈처는 1992년부터 매년 12명 이상의 독립운동가를 각 월별로 지정하여 발표하고, 이들의 공훈을 선양하기 위해 추모 행사와 전시회 등의 기념사업을 벌이고 있다. 올해 7월의 독립운동가는 성재 이동휘 선생(이하 선생)이다. 정부는 선생의 독립운동 공훈을 기리어 199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선생은 함경남도 단천 출신이지만 1900년대 초반 보창학교 설립, 1907년 정미의병투쟁, 1919년 만세운동으로 이어지는 강화 독립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조선이 식민지로 전락할 당시 강화가 당당히 역사의 주역으로 일제에 맞서고, 근대교육이 활발하게 펼쳐지게 된 데는 선생의 역할이 지대하여 가히 강화의 은인(恩人)’이라고 일컬을 만하다.

선생의 수하였던 강화진위대의 병사, 교회 청년, 보창 학교의 제자, 그리고 의형제를 맺었던 강화지역 소장인사들이 강화의 3.1만세운동과 교육운동을 이끌었다. 의형제를 맺었던 윤명삼은 내리에 니산학원(현재 심도중학교)을 설립했고, 진위대 병사였던 유봉진은 3.18만세운동을 이끌었다. 제자인 송암 박두성은 최초의 한글점자인 훈맹정음을 만들었다.

지금 선생의 흔적은 강화중앙감리교회 역사관에 보관되어 있고, 선생을 강화에서 기리는데는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각종 강화사료(史料)에 행적이 비교적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도 여태 선생에 대해 무관심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강화군과 관련기관에 7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생이 선정된 사실을 문의하자 아무도 몰랐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당연히 선생을 추모하거나 현양하는 일은 생각조차 못하고 있다.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으로 민은 민대로, 관은 관대로 대대적인 행사를 벌이고, 그때 마다 성재 이동휘 선생을 거론하였던 터라 뒷맛이 씁쓸하다.

선생은 함경도 출신인데다가 후손마저 대한민국에 거주하지 않아 선생을 기리는 일이 쉽지 않다. 성재이동휘선생기념사업회 이순택 상근부회장은 기념사업회 역시 원로들이 주춖이라 추모식과 탄신일 행사를 진행하는 것 외에 여력이 없는 상황이라고 한다. 다만 행적이 뚜렷이 남은 강화군에서 흉상 건립이나 작은 규모일지라도 기념관을 조성하여 기리는 사업을 펼쳐주기를 바란다는 소망을 전한다. 기념사업회는 이동휘 선생이 이 달의 독립운동가 선정을 기념하여 오는 719일 성재 이동휘 선생 선양 학술세미나를 광복회관에서 개최할 계획이다.

성재 이동휘는 누구인가

대한민국임시정부 신년축하회 모습. 빨간 원 안이 성재 이동휘 선생

성재(誠齋) 이동휘(李東輝) 선생은(18731935)은 함경남도 단천에서 출생하였다. 1895년 한성무관학교에 입학한 뒤, 1902년부터 강화진위대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1904년 러일전쟁 발발 이후 일본의 침략이 가속화되자, 선생은 19053월 군직을 사임하고 보창학교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운동에 헌신하였다. 아울러, 대한자강회 결성에 참여하는 등 민족주의 교육과 구국계몽운동에 적극적이었다.

1908년 선생은 서북·관서·해서지방 출신자들 중심으로 구성된 서북학회를 창립했다. 서북학회의 목표는 국권회복·인권신장을 통하여 근대문명국가를 달성하고자 했다. 한편, 안창호 등과 비밀결사인 신민회를 조직하여 계몽운동과 항일투쟁을 전개하던 중 19113“105인 사건으로 일경에 피체되어 인천 무의도에 유배되는 고초를 겪었다. 19132월경 북간도로 망명해 김립, 계봉우 등과 광성학교를 설립하여 꾸준히 민족주의 교육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310, 러시아 연해주로 거점을 옮겨 블라디보스톡의 신한촌(新韓村)을 중심으로 조직된 권업회에 가담하여 이상설, 이갑, 신채호 등과 함께 독립전쟁론에 입각한 민족해방 투쟁활동에 적극 투신하였다. .

1914년 항일광복전쟁계획을 수립하였다. 이를 위해 만주와 러시아의 민족운동세력을 규합한 대한광복군정부를 조직하였으며, 북간도 왕청현 나자구에 사관학교를 설립하였다. 선생은 이상설에 이어 2대 정도령(正都領)에 취임하여 광복전쟁계획을 총지휘하였다.

19173월 러시아 2월혁명 소식을 접한 선생은 새로운 일을 도모하고자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을 찾았지만, 러시아헌병대에 독일간첩 혐의로 피체되어 10월혁명 후인 191711월에야 석방되었다. 1918513, 하바로브스크에서 김알렉산드라, 유동열, 김립, 오성묵, 오와실리, 이인섭 등 동지들과 최초의 한인사회주의정당인 한인사회당을 창당하였다. 한인사회당은 기관지 발행, 군사학교 설립, 일본군병사들을 상대로 한 선전활동을 추진했다.

191931운동 직후에는 블라디보스톡에서 문창범 등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고, 대한임시정부 군무총장으로 동녕현에 임시군집부를 설치하여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그해 8월말, 상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총장 및 초대 국무총리에 취임하여 임시정부 내외의 동조세력을 규합, 사회주의 운동 확산을 위해 전력을 기울였다.

19213월 임시정부 국무총리직을 사임한 후에는 국민대표회의 집행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에 전력하였으나, 1935131, 블라디보스톡 신한촌(新韓村)에서 감기에 걸려 62세를 일기로 서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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