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위해 청춘을 바친 진짜 사나이
나라를 위해 청춘을 바친 진짜 사나이
  • 글, 사진: 김세라 기자
  • 승인 2019.06.21 2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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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전쟁 참전용사 화랑무공훈장 김관식 옹

올해는 한국전쟁 발발 69주년입니다. 최근의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대학생 10명 가운데 4명이 한국전쟁에 대하여 잘 모른다는 대답을 선택했다고 합니다. 전쟁을 겪지 않은 요즘 젊은이들은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청춘을 바쳤던 선조들의 희생을 잘 알지 못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21살의 나이로 6.25에 참전했던 김관식 옹(91)에게 한국전쟁의 의미를 질문 드렸습니다.

강화뉴스(이하 강화) 고향은 어디십니까?
김관식 옹 찬우물이에요. 원래는 1928년생인데 호적에는 29년으로 되어 있지요.

강화 한국전쟁 전에는 어떤 일을 하셨나요?
김관식 옹 해방 후에 강화에 호국군이 생겼어요. 원래 강화 장터는 지금 용흥궁 주차장 근처였거든. 거기에서 만세운동도 하고 그랬다죠. 호국군은 일종의 향토방위군인데, 장터에 송해면, 하점면, 선원면, 강화읍 사람들 모아서 군사훈련을 시켰어요. 호국군 중대장이 나와는 사돈이야. 그분에게 배워서 교관이 되었지요. 군사지식이 전혀 없는 일반인들에게 제식훈련은 물론, 이론도 가르쳤어요.

강화 호국군으로 있다가 한국전쟁이 터졌으면 바로 입대를 하셨겠네요
김관식 옹 인민군이 교인들은 가만 두지 않는다는 소문이 돌았어요. 몸을 숨겨야 했죠. 강화면장이랑 같이 새벽에 아침밥 먹고 찬우물 고개로 피신했다가 한밤중에 집으로 내려와서 쪽잠 자고 그랬어요. 그렇게 한 여름 내낸 산꼭대기에 있었는데, 거기에서 월미도가 보이거든요. 9월 중순 쯤 인가, 군함 한 채가 쓱 들어오더니 폭격을 시작 하더라고요. 사흘 동안 하늘에서 폭우처럼 포가 쏟아졌어요. 그렇게 폭격이 끝난 후 맥아더 장군이 월미도로 그냥 걸어 들어갑디다. 그걸 찬우물 정상에서 직접 목격했지요. 928일일 서울 수복했던 소문 듣고 나니 숨통이 좀 트이더라고요. 그제야 비로소 피난 채비를 했죠.

강화 피난은 어디로 가셨어요?
김관식 옹 전쟁 터지자마자 강화에서는 아비규환이 벌어졌어요.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지역 주민들 끼리 편이 갈라져서 죽고 죽이고 그랬죠. 지옥이 따로 없었지. 피난을 결정하고 하루 동안 걸어서 초지에 도착했는데, 인파에 밀려 피난선을 못 탔어요.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외포리에서도 배가 떠난다고 해서 서둘러 갔지. 미군이 마련한 함선이었는데, 세상에 그렇게 큰 배는 태어나서 처음 봤으니까. 얼마나 높던지 사다리 타고 기어 올라갔어요. 그 배타고 제주도까지 갔는데, 결국 거기에서 입대를 했습니다.

강화 피난 가서 입대를 하셨다고요?
김관식 옹 고향에서 서로서로 칼부림 하는 게 진절머리 나서 입대 안하려고 했는데, 호국군 교관이었다는 것을 육군 대령이 알게 된 거에요. 소대장 되라고 하는데, 내가 안한다고 했어. 대신 정보계로 보내달라고 했지. 다행히 허락 하더라고요. 그래서 강원도 화천에 있는 백암산 고지에서 근무하게 됩니다.

강화 입대 후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임무를 담당하셨나요?
김관식 옹 중대 배치를 했는데, 사실 그건 계급이 높은 지휘관들이 해야 하는 거 에요. 낮에는 아군이 점령하고, 밤에는 인민군에게 빼앗길 만큼 치열한 접전지였는데, 이제 막 사관학교 졸업한 장교들이 아는 게 있어야지. 실전 경험이 부족하여 지휘관들이 여럿 사망했거든요. 그러다 보니 계급은 낮아도 호국군 교관이었던 나에게 작전업무가 주어진 거죠. 제가 원래 군사지도는 볼 줄 몰랐어요. 중대장에게 배워서 군사지도를 읽게 되었는데, 나중에는 등고선만 봐도 해당 지형이 눈앞에 그려졌으니까.

강화 아군과 인민군이 엎치락뒤치락 하던 전장이었으니, 긴장감이 엄청났을 것 같아요.
김관식 옹 작전상 후퇴가 세 번 있었어요. 아군은 장비도 많고 실탄도 풍부했지만, 인민군은 인해전술이었죠. 변변한 총도 없는데, 땅에 쫙 붙어서 기어 올라가면 아무리 쏘아도 총을 안 맞아. 결국 아군도 포기하고 철수 하는 거죠. 하루는 인민군이 벌 떼처럼 몰려온다는 정보가 들어왔어요. 그날도 아군이 고지를 점령했었거든. 이번에는 안 빼앗기려고 단단히 마음먹었는데, 인민군이 조명탄을 어마어마하게 쐈어요. 주변이 대낮처럼 환했죠. 우리 전력 보호를 위해 결국 퇴각 명령이 떨어졌어요. 지휘관들도 우왕좌왕하고 난리가 났죠. 그래서 다른 부대 먼저 내려 보내고, 작전 담당인 제가 제일 마지막에 내려갔습니다. 중대장에게 끝까지 제가 남아있겠습니다, 말씀 드리면서 이렇게 장담했어요. 걱정 마세요. 나는 절대 안 죽습니다.

강화 죽음 앞에서는 누구나 두려울 수밖에 없을 텐데요.
김관식 옹 이상하게 안 죽는다는 확신이 있었어요. 그 때가 한여름이었는데. 삼복더위에 군복이 땀으로 젖어서 몸에 달라붙어서 제대로 걸을 수도 없었죠.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젖은 군복 때문에 몸은 무겁지, 뒤에서 인민군은 당장 쫓아 올 것 같지, 어린 병사들은 무서워서 꼼짝을 못해. 한발자국도 못 간다고 야단인데 지휘관들도 지들이 힘드니까 속수무책이에요. 그래서 제가 대뜸 그랬죠. , 아무개지? 그랬더니 상대방이 깜짝 놀라요. 깜깜한 밤에 자기이름 아는 사람이 등장했으니까. 그래서 제가 잡혀 죽을 셈이냐! 당장 도망 쳐! 그렇게 고함치며 엉덩이를 걷어차니까 그제야 막 달려갑디다.

강화 상상만 해도 오싹하네요.
김관식 옹 그렇다고 늘 그렇게 무서운 전투만 벌어진 건 아니에요. 우리 부대가 금강산까지 밀고 올라갔거든. 그때는 인민군과 폭 50m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했는데, 인민군이나 아군이나 다들 젊으니까, 장난기가 발동 한 거지. 강 건너 인민군 향해, 이 자식아, 밥은 먹었냐? 소리치니까, 그쪽에서도 답을 주더라고요. 그러는 너는 먹었냐! 그래. 그렇게 농담 따먹기 하다가도, 다시 교전이 개시되면 총부리를 겨눠야 했지. 그래서 전쟁이 무서운 거 에요. 인민군이 밀고 들어온다고 해서, 우리가 일부러 후퇴를 했거든. 50리 쯤 뒤로 물러났어요. 인민군이 와서 보니 텅 비었잖아요. 신나서 막 건너 온 걸 확인 하고, 비행기로 강을 향해 포격을 가했어요. 강물이 넘치라고. 물난리로 퇴로를 막아 버린 후, 아군이 다시 진격 했지. 인민군은 꼼짝 못하고 전멸 했어요.

강화 두 번 다시 전쟁이 벌어지면 안 된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하게 됩니다.
김관식 옹 그렇게 목숨 걸고 싸워서 고향에 돌아오고 보니, 다행히 강화는 인민군 피해가 많지 않더라고요. 강화에는 특공대인 소년단이 있었대요. 그래서 인민군은 강화를 못 들어왔어요. 나는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중대장님이랑 대대장님이 무공훈장을 추천 해주셨거든. 지휘관이 해야 할 일을 해줘서 고맙다면서. 그렇게 훈장을 받고 고향에 돌아와 보니, 집집마다 다 유공자래요. 알고 보니 그때 강화에 고씨 성을 가진 사람이 보훈 관련 일을 하고 있었는데, 지인들을 죄다 유공자로 올린거지. 어떤 사람은 나이도 안 맞아.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 너 군대도 안간 놈이 유공자 뺏지 달았냐? 그랬더니 그 다음부터 뺏지는 안 달고 다니더라고. 수치심을 모르는 인간들이 참 많아요.

강화 마지막으로 강화뉴스 독자들에게 한말씀 부탁드립니다.
김관식 옹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평화는 공짜로 얻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렸지요. 두 번 다시 이런 불행한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나라를 위해 싸웠던 젊은이들의 희생을 꼭 기억해 주세요.

 

: 김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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