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3.1운동 100년, 통일로 새 100년] 조봉암의 백비(白碑) (1899~1959)
[강화3.1운동 100년, 통일로 새 100년] 조봉암의 백비(白碑) (1899~1959)
  • 나문재
  • 승인 2019.06.17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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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봉암. 본관은 창녕(昌寧), 호는 죽산(竹山)이다. 1899년 9월 25일 강화군의 빈농 집안에서 태어났다. 1911년 강화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강화군청 고원(雇員)으로 근무했다. 강화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참여하였다가 1년간 투옥되었다. 출옥 후 YMCA 중학부에 입학했다. 일제시기 사회주의 항일운동을 하였으나, 광복 후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하였고, 초대 농림부장관과 국회부의장을 역임하였다. 1958년 1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1959년 7월 사형이 집행되었으나 2011년 1월 대법원의 무죄판결로 신원이 복권되었다(본 내용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나온 내용을 편집자 가 정리한 것입니다)  

조봉암 교수대에 서다.
731일은 죽산 조봉암이 세칭 진보당사건으로 사형을 당한지 60주년이 되는 날이다. 그가 숨을 거둔 서대문형무소를 찾았다

서대문형무소 사형장 : 내부는 사진촬영 금지이나 사형집행을 위한 개폐식 마루판과 의자, 그 위의 교수줄(絞首~)이 눈에 띈다.
서대문형무소 사형장 : 내부는 사진촬영 금지이나 사형집행을 위한 개폐식 마루판과 의자, 그 위의 교수줄(絞首~)이 눈에 띈다.

그 때(195981), 동아일보는 조봉암의 사형 관련 기사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조용히 교수대의 이슬로 / 사형수 조봉암 처형 순간의 모습 / 설교와 기도를 자청 - 마지막 술 한 잔과 담배 한 대도 청하고 / 창백해진 얼굴에 끝내 무표정

<속보>
사형수 조봉암에 대한 형 집행은 (7)31일 상오 113분 서울형무소내(서대문형무소)의 형장에서 교수형으로 집행되었다.~ 진보당 사건으로 지난 227일 대법원의 최종심에서 간첩죄란 죄명 등으로 사형이 확정된 조봉암은 경찰에 정식 구속된 날부터 만 16개월 18일 만에 사형으로 집행되었다. ~ 집행관의 마지막 유언 권유에 그는 별로 할 말은 없고 다만 이 세상에서 고루 잘 살려고 한 짓인데 결과적으로 죄짓고 가니 미안 할뿐이며 남은 가족들은 자신들이 잘 알아서 살터이니 ” ~ 이윽고 가슴에 二三一번호표를 붙이고 양손을 묶인 채 창백해진 얼굴로 교수대에 선 사형수 조봉암은 입회한 목사에게 설교와 기도를 해 줄 것을 부탁했다. 목사의 기도와 설교가 이어졌고 이어서 우리가 다 일어나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고소하여 가로되 누가복음23장이 목사의 떨리는 목소리로 읽어졌다. 눈을 감은 채 다 듣고 난 조봉암은 집행관의 인도로 조용히 교수대에 다가섰다. 그의 두 눈에 하얀 수건이 가려졌다. 의자에 앉은 그의 목에 밧줄이 걸리고 철썩하는 가벼운 소리와 함께 그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고 ~

술 한 잔과 담배 한 대만 주시오라는 조봉암의 마지막 요청은 규정에 의하여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조봉암 사형 소식의 충격과 두려움 속에서 괴로워하던 시인 신경림(1935~ )은 몇 년 뒤 시 한편을 세상에 내놓는다.

'그날'

젊은 여자가 혼자서 / 상여 뒤를 따르며 운다 / 만장도 요령도 없는 장렬
연기가 깔린 저녁길에 / 도깨비 같은 그림자들 / 문과 창이 없는 거리
바람은 나뭇잎을 날리고 / 사람들은 가로수와 / 전봇대 뒤에 숨어서 본다
아무도 죽은 이의 / 이름을 모른다 / 달도 뜨지 않은 어두운 그날

백비(白碑) - 조봉암 묘비

조봉암 묘 – 서울 중랑구 망월동 묘지공원 내
조봉암 묘 – 서울 중랑구 망월동 묘지공원 내

2008, 조봉암의 장녀 조호정(당시 81)씨 등 유족들이 대법원에 재심신청을 했고, 20111월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 ~ 조봉암은 북한의 지령을 받아 간첩행위를 했다고 볼 증거가 없다." 며 무죄판결을 내렸다. 간첩죄로 사형 당한지 52년 만이었다.

대법원의 판결문 일부이다. " 진보당은 사회적 민주주의의 방식에 의해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부작용이나 모순을 수정하려 했을 뿐 국가 변란을 목적으로 구성된 결사(結社)로 볼 수 없다.~ 피고인에게 국가보안법 위반죄를 적용한 원심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

조봉암은 죄가 없다는 것이다. 서울 중랑구 망월동 조봉암의 묘를 찾았다. 요즘 수년간 조봉암선생 기념사업회에서 묘 주변을 단장하고 있다.는 관리소의 말대로 묘역은 수년 전 찾았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아니 주변 어느 묘보다 밝은 모습이다. 계절 탓()만은 아닌 것 같다.

천천히 둘러본다. 묘비 앞면의 '竹山 曺鳳岩先生之墓란 글은 서예가 김충현이 쓴 것인데, 당시 그는 이 일로 곤욕을 치렀다고 한다.

조봉암! 어떤 사람으로 기록되었나, 비석 옆·뒷면을 본다. ~ 아무것도 없다. 통상적으로 새기는 출생과 사망연도 그리고 행적이나 치적 등 아무 것도 없는 말 그대로 백비(白碑)이다

조봉암 묘비 뒷면 - 아무것도 새겨져 있지 않은 백비(白碑)이다.
조봉암 묘비 뒷면 - 아무것도 새겨져 있지 않은 백비(白碑)이다.

조봉암이 사형된 뒤, 유족과 창녕 조씨 문중에서 비문 제작을 거부했다고 한다. 할 말이 없어서만이 침묵을 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 잘못 없이 벌을 받거나, 너무 분하고 답답할 때, ‘억울하다.’ ‘할 말을 잃다.’ 라고 한다. 고인의 명예 회복, 나아가 정당한 역사적 평가가 새겨진 비석이 세월 질 날이 오길 고대하며 묘역 입구 바위에 새겨진 조봉암의 <어록>을 읽어본다.

竹山 조봉암 선생 (1899~1959. 정치가) “ 우리가 독립운동을 할 때 돈이 준비되어서 한 것도 아니고 가능성이 있어서 한 것도 아니다. 옳은 일이기에 또 아니하고서는 안 될 일이기에 목숨을 걸고 싸웠지 아니하냐.”

어디선가 들리는 새 소리에 조봉암의 장녀 조호정씨가 하던 말이 생각난다. 아버지가 형무소에 계실 때 밥을 조금 남겨가지고 창가에 날아오는 새에게 날마다 주었답니다. 몇 번 반복되자 매일 날아오던 그 새가 아버지가 처형당하자 다시는 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이 새를 봉암새’ ‘죽산새라고 불렀다. 혹시나 해서, 귀를 열고 하늘을 두리번거린다

조봉암 어록에 새겨진 바위
조봉암 어록이 새겨진 바위
죽산 조봉암 선생
죽산 조봉암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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