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동윤 선생이 말하는 강화직물 이야기(두번째)
임동윤 선생이 말하는 강화직물 이야기(두번째)
  • 박흥열 기자
  • 승인 2019.05.16 17: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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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번째 이야기에서 이어집니다

임동윤 선생
임동윤 선생

그럼 어르신이 직물업계 근무한 거는 10여년 정도 되나요?

내가 6.25사변 때 금융조합에 있었거든. 전쟁나자 소집돼서 군대 갔다가 휴전 이듬해인 1954년에 제대했어. 금성금화지구 전투에서 살아남았어. 제대하고 취직하러 다니고 했는데, 형이 사람 필요하다고 오라고 해서 한 3달 거기서 일했어. 그런데 내가 형 성격을 아니까 가기 싫은 걸 억지로 갔지. 김재소씨하고 둘째형이 친형제보다 더 가까웠어.

사무실에서 일을 보면서 아이들 뽑는 거, 형심부름 하는 거지. 처남도 몇 있고, 사촌들도 있는데 막일 다하는 거지. 내 밑의 동생이 거기 있다가 죽었어. 중학교 3학년, 정부 수립 전에 포병 1기로 군대 갔다가 7년 있었어. 9.28 수복하고 북진해서 신의주까지 갔다가 왔지. 제대하고 나서 이틀 먼저 동생이 제대했다고 왔어. 형제가 나갔다가 둘이나 살아왔다고 아무 탈 없이 돌아오니 큰형한테 또 소집장이 나오더라구. 형님은 군대나갔다가 인천까지만 갔다가 왔어.

둘째 형네서 일할 때 설 차례 지내고 이튿날 나가서 일하는데, 술 처먹고 다닌다고 막 그러는거야. 술 달라, 밥 달라고 한 적도 없어. 동생하고 조양에서 온 공장장이 말렸지만 더러워서 여기 못 있겠다고 하고 나와 버렸어.

지금 우리은행 자리에 있었던 삼신운수에 들어갔어. 거기서 10년 있었어. 매부뻘 되는 사람이 이력서 써오라고 해서 삼신운수회사에 갔지. 그때 우리는 남문 안 사택에서 일을 봤는데, 매일 관외로 출장을 다녔어 가마니 사러. 일 년에 100만매씩 사고 그랬어. 염가마, 비료 가마, 곡용 가마, 곡용가마는 촘촘히 튼튼하게 짜서 비싸고, 비료가마, 염가마가 제일 허술하지. 염가마가 제일 많아. 곡용, 비료 가마는 많지 않아. 내가 망월, 건평, 외포리, 하점 여기서 곡용, 비료 가마를 짜고 다른 데는 다 염가마야.

삼신운수회사에서 경기산업이라고 전기산업회사 계통인데, 삼신운수가 경기산업하고 연관이 돼서 경기산업의 대행을 삼신운수가 한 거야. 매일 돌아다니는 거야. 오늘은 이 면, 내일은 저면으로 돌아다니는 거지. 가마니가 많이 난다 그러면 트럭으로 가는 거지. 집에도 못 들어와.

삼신운수 사장이 곽희준씨, 살았으면 120살이 되었을 텐데, 6.25 터지면서 원래 사장은 납북되고 금융조합 이사로 있던 곽희준씨를 사장으로 앉힌 거지. 인천 상업학교을 나왔어. 이 이는 왜정 때 이사가 되었어. 왜정 때 풍덕금융조합 이사로 나갔다가 온수리 금융조합 이사로 왔거든. 처음에 나는 이 사람이 일본사람인줄 알았어. 요렇게 수염 기르고. 해방되고 일본사람이 다 없어지니까 노인들이 높은 자리 여기저기를 다 차지하는 거 아냐.

그때 면을 돌면서 가마니를 사서 포구마다 목선이 있는데, 목선에다 실어서 인천으로 갖다가 팔았지. 공판장에서 사서 검사원을 데려가 검사한 뒤 반출검사를 받아야 해. 30매씩 묶어서 한 동으로 만들어서 목선에다 싣고, 인천으로 내려 가는 거지. 인천에서 받아서 각처로 가는 거지.

가마니, 화문석 짜는게 그 때는 꽤 돈이 됐어. 부업이 크지. 겨울에 노느니 가마니 짜는데, 돈 있는 사람이 사달라고 돈 맡기고 했거든. 회사에서는 일 년에 백만 매씩 샀어. 가마니 하나에 가격이 한 장에 이십 원(염가마), 곡용 가마는 사십 원 정도 하고 그랬어. 한번 나가면 이삼백만 원어치 씩 사고 그랬어.

또 삼신운수가 엠뽀트를 맡아서 했어. 갑곳나루에서 차도 실어 나르고 하는. 어떻게 됐냐면 그때 상이용사들이 많이 있었을 때야. 이 상이용사들을 정부에서 먹여 살릴 도리가 없으니, 엠뽀트를 한 대 불하해서 준거지. 먹고 살라고. 그런데 해보지 않던 놈이 할 수가 없으니, 고장 나면 고쳐야 되는데, 한 푼도 없이 하려고 하니 운영을 못하지.. 남의 돈으로 빚만 지니까 상이용사 회장이 삼신회사에 와서 빚이 이백만원인데 그것만 주면 빚 갚고 동업하자고 해서 엠뽀트를 하게 된 거야.

내가 이백 만원을 자루에 넣어서 상이용사 회장 집에 갖다 준 기억이 나. 엠뽀드를 처음 할 때는 애로가 많았어. 잘 안되니까. 그런 찰나에 윤일상씨가 국회의원이 되어 강화 지역발전을 위한다고 엠뽀트를 두 대 사서 꽂았어. 지금 갑곳나루에. 강화발전을 위한다고 했지만 한 대로 운행해도 안 되는데, 두 대씩 들어오니까 거기도 안 되고, 여기도 안 되고.

그러니 한 2년 지나자 또 저쪽에서 동업하자는 거야. 자기들이 6백 만원 투자한 걸 갚아주면 합동으로 운영하겠다 해서 시작했는데, 동업을 한 사람이 곽희준씨하고 저쪽은 세 사람(윤일상처남, 면장, 개인)이었어.

이익금이 백만 원 남으면 곽희준씨는 50만원 나머지 세 사람이 50만원을 노나 갖는 거지. 그러다가 점차 엠뽀트로 돈을 버니까 조흥은행에 돈을 맡기는데 천만 원, 이천만원씩 했어. 당시 국회의원이던 김재소씨가 하는 말이 강화에서 이천만원 예금한 사람은 곽희준씨 밖에 없다는 거야.

근데 곽희준씨가 그렇게 돈을 벌어도 내가 십년 댕겼는데 퇴직금을 천원도 안주더라고. 당시에 월급이 만원정도 했거든. 처음에는 우리 같이 먹고 살거다라고 하더니 월급도 잘 안주고, 해서 삼신운수 관두고 심도직물 들어 간 거지.

내가 이백 만원 갖다 주고 산 엠뽀트 이름이 통일호야. 삼신운수 회사 돈으로 샀고, 등기도 회사로 되어있어. 또 윤씨네한테 준 6백만 원도 회사 돈으로 다 갚았거든. 그런데 돈을 벌어도 반절만 회사에 집어넣더라고. 나머지는 개인이 슥삭하는 거지.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내가 평생 여기서 늙나? 나도 먹고 살아야지 하는 거야. 나중에 그 양반이 서울 등촌동 어디에 종친회 묘지가 있는데 일가친척 한사람하고 그걸 짜고 먹으려고 하다가 탄로가 난 모양이야.

그래서 밤낮 검찰에 왔다 갔다 하고 재판하면서 돈을 쏟아 부었어. 이 할아비가 그렇게 돈이 불 때 말이야. 인심도 쓰고 어려운 사람 구제도 하고, 데리고 있는 사람 돈도 주고 해야 하는데, 지가 독식하니까 그렇게 되더라구.

강화부자들이 인심이 그리 야박하지 않았다고 하던데요?

홍부자 소작인이 많았는데, 그 집 창고가 컸어. 곡식을 쌓아놓으면 반은 그 사람이 먹고, 반은 땅 사는 거야. 소작인들도 집에 오면 자고 먹고 가는 거지. 인심이 그리 야박하지는 않았는데 부자도 망하려면 자식 농사도 그렇고 안 좋아. 자식을 낳고 나서는 고생을 시켜야지. 고생을 안 하면 부모가 돈이 있으니까 벌 줄은 모르고 쓸 줄만 알아. 내가 고생을 해야 돈 벌 줄을 안다고. 부자 자식은 버리는 거야. 사람 버리는 거야.

해방되고 나서 토지 개혁하는데 조봉암이 초대 농림부장관이잖아. 여기 웃 장판에서 사람 모아놓고 토지개혁을 선언했어. 조봉암이 1899년생이야. 강화보통학교 졸업하고 강화군청, 유수부에서 급산가 뭔가 했대. 자전거타고 서울로 문서 연락 다니고 그랬대. 언제 공산대학을 댕겼는지는 잘 모르겠어. 아까운 사람이었지. 말도 잘하니까 초대 농림부 장관도 시키고 했는데, 나중에 이승만이 빨갱이라고 몰아서 없애는 거지. 지금 생각해도 아까운 사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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