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동윤 선생이 말하는 강화직물 이야기(첫번째)
임동윤 선생이 말하는 강화직물 이야기(첫번째)
  • 박흥열 기자
  • 승인 2019.05.16 16: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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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동윤 선생은 1930년생, 올해로 아흔이다. 한국전쟁이 끝난 1954년 둘째 형님이 운영하던 상호직물에서 잠깐 일한 뒤 강화지역 운수회사인 삼신운수에서 10년간 근무한 뒤 심도직물에서 7, 조양견직에서 3년간 일했다. 임동윤 선생의 구술에 등장하는 인물, 연도, 사건 내용 등이 기억에 의존하다보니 사실과 다소 다른 부분이 있을 수 있으나, 전체 맥락에서 강화 직물사 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구술이라 판단되어 일부를 발췌하여 2회에 걸쳐 게재한다

임동윤 선생
임동윤 선생

내가 올해 아흔인데, 1930년생이야. 우리 형님도 사셨으면 아흔 넷이나 되고 위로 세분이 있고 밑으로 동생이 있었어. 다 가고 혼자 남은 거지. 상호직물이라고 둘째 형이 신문리 쪽에서 운영 했는데 지금은 없어.

조양방직, 나중에는 조양견직주식회사로 바꿨는데 1937년에 만들었다가 39년에 불이 났고, 40년부터 공장을 돌렸어. 강화부자 만석꾼인 홍재묵(꼽추), 홍재용(동생, 해방 후 초대군수)형제가 연백, 강화, 김포에 땅이 많았어.

신문리의 자신의 논 오천 평 부지를 메꿔서 공장을 지었지. 일본에서 쓰요다라는 자카도 견직기(비단짜는 기계)100대 들여왔고, 처음에는 다 못 돌렸어. 자기 가족, 친척들을 데리고 일을 시작했는데 3년을 못 돌렸어. 왜냐하면 공장을 만들었던 소화12(1937)에 지나사변(중일전쟁)이 일어났거든. 소화6(1931)에 만주사변이 일어나고, 일본이 중국을 먹어 들어가고 전쟁을 하니 군복을 많이 만들었지. 비단 같은 건 소비도 적고 해서. 일본이 전쟁을 하니까 비단을 제대로 못 짜고, 평직이라든지 그런 것만 했어. 뭐 편안해야 비단을 입는데 누가 입나.

또 친척들이 일을 제대로 못하니까 3년을 못 돌리고 관두었어. 그리고 나중에 일본 미쓰이 물산 서울지사에 근무하던 개성부자 이세현 씨한테 넘겼어. 실을 미쓰이 물산이 대고 했는데, 강화 직물을 많이 생산하기 위해서 전화나 전기가 들어오고, 하점으로 나가는 도로를 만들기도 했다고 해.

이세현이 개성부자라고 하니까 중앙에서 이승만 박사가 끌어 댕겨서 48년 단독정부가 서고 난 다음 정계에 들어갔어. 아마 상공회의소 회두, 금융통화위원회 위원장도 하고 그랬어요. 여기 조양방직은 이종배라고 큰아들이 전무이사로 있었지. 해방이 되고 나니 전국적으로 비단을 짜기 시작한 거예요. 그때 비단을 짜서 돈을 많이 벌었어. 도라꾸로 돈을 싣고 다닐 정도로 모았어. 물건 싣는 자동차가 다녀야 하니까 논자리에다 길을 내고, 그걸 갑고지에서 배로 싣고 다니곤 했어.

그 사람이 견직물로 뉴통, 비로도 등을 짜가지고 돈을 많이 벌었는데, 시흥에 있는 광산에 투자했다가 망했어. 조흥은행에서 대부를 받아서 투자했는데, 광산투자가 실패하니까 차압이 들어와서 망한 거지.

강화 최고 전성기가 60 - 70년대인데, 직물공장이 37~38, 40개 가까이 되었어. 처음에는 수직기로 하다가 6.25전까지는 주로 개인이 했어. 그때 주식회사로는 산업조합(소화6), 조양견직(소화9)이 있었고 산업조합 전에는 강화화련협동조합이 있었어.

이세현씨가 망하니까 6. 25 전쟁 이후에도 큰 공장을 놀리게 되니까 경성방직 김연수씨 친구인 전홍구라는 사람이 맡아서 운영했어. 그때 내가 심도직물에 7년 있다가 조양견직으로 가서 거기서 3년 있었거든. 경성방직 김연수가 한 50년 굴리던 도요타 직기를 새 기계로 바꾸면서 이걸 줄 테니 임직(하청)을 해라, 그래서 경성방직 면직물을 임직했던 것인데, 그게 조양견직에서 경화직물주식회사로 이름을 바꾸어서 한 거야. 경성방직에서 실을 대주고, 기계도 대준 거지.

전홍구씨가 처음에는 처남을 앉혔는데 이이가 여자하고 노름밖에 몰라. 공장은 모르고, 둘째아들을 갖다놓았는데 공장 여자들을 건드리고 해서 못 돌리고 망하더라고. 1980년 되기 전에 둘째 며느리한테 넘겼는데, 그이도 몇 해 하다가 그만두었어. 그런 걸 황희주라는 영종 사람인데, 처가가 강화야. 빌딩이나 땅이 많은 부자야. 그 사람이 산거지. 지금은 자식하고 부인이 소유일거라.

경화직물이 한때는 유신산업주식회사라고 이름을 잠깐 바꿨어. 전두환대통령 시대일걸. 1950년대 심도직물이 잘 나갈 때 주식회사로 만들고, 1960년대에 내 둘째 형이 하던 상호직물, 이화직물, 남화직물(쌍과부네), 경도직물 전부 주식회사로 만들었어. 그랬다가 1980년에서 90년 사이에 다 없어졌어.

동락천을 가운데 두고 직물공장이 많았어. 조양방직과 남화직물이 신문리에 있고, 관청리에 심도직물, 이화직물이 모여 있었거든. 내가 심도직물에 7년 있었는데 그때는 읍내에 처녀하고 남자들이 6-7천명이 들끓으니까 모든 장사들이 잘되고, 술집도 잘되고 괜찮았지.

중앙시장 옆 새시장은 1966년도에 우리 형이 번영회 회장인가 뭔가 해서 시장을 새로 맹글었어. 박정희가 지어준 거라 하지만 그건 아니고, 우리 형이 임시 번영회장인가 뭔가 할 때 6평에 5만원씩 분양을 했지. 6평짜리 한자리씩을 5만원에 분양했다고. 그 사람들이 분양을 받아서 그걸 들어간 거지. 사고팔고 하면서 선술집이 한 40개가 들어오고, 전부 색시 데리고 술장사를 하곤 했거든. 술장사 1년만 하면 집한 채 생기고 할 때였지.

심도직물을 만든 김재소씨는 경북 선산 출신으로 박정희랑 고향이 같았어. 그 이가 병진생으로 1916, 올해로 104살이 되거든. 이 양반이 20대 때 먹고 살기 어려우니까 일본으로 갔어. 고학하다가 일본 직물계통에서 일했다고 해. 일본서 공장 일을 배우고, 평양으로 가서 직물공장 검사원으로 있었는데, 1947년에 강화로 들어왔어. 고모부가 조양방직 공장장으로 있던 마진수씨였는데 그 이가 하던 것이 평화직물(현재의 소창체험관)이었지. 마진수씨는 해방 전에 이세현씨가 조양방직할 때 거기 공장장으로 지냈거든. 그래서 김재소가 강화에 고모부가 있으니까 고향으로 안가고 니쿠사쿠를 메고 강화로 온거지. 마진수씨가 주선해서 옛날 방앗간이 있던 자리에 기계 5대를 놓고 직물을 짜기 시작했어. 그러다가 6.25때 피난 갔다가 다시 들어와서 직물을 짜는데 잘 벌었지. 다 헐벗고 할 때니까. 그래서 돈 버는 대로 주변 터를 사서 4,000평 정도 됐지. 지금 성공회 밑의 용흥궁 자리가 심도직물이 있던 데야.

공장을 돌리는데 자주 정전이 되니까 일본서 발전기나 직물가공기도 들여오고 했어. 돈을 많이 벌었어. 지금 SK, 거기가 원래는 수원에 있는 선경직물이야. 그 선경직물은 원래 일본사람이 하던 공장인데 선경 회장했던 최종근이란 사람이 물려받아서 공장을 한 거지. 최종근은 6.25 전쟁 끝나고 전국직물연합회 회장을 했어. 그래도 그때는 선경직물보다 심도직물이 훨씬 좋았지. 최종근이 직원들을 데리고 심도직물 구경도 오고했어. 심도직물은 비단을 많이 짜는데 선경직물은 백판, 평직을 많이 짜. 한국에서 실을 못 만들 때, 이승만이 일본과는 거래를 못하고 하니까, 실을 미국에서 수입해서 평직을 짰는데 로스가 많이 생겼어. 서울에 빌딩을 지을 때 로스모아 빌딩 지었다는 이야기도 나돌고 했어.

그때 강화에는 국회의원이 이돈해씨라고 중학교 교장하던 사람이었는데, 교육장도 하고 공무원인데 돈이 있었어. 이돈해, 윤일상· 윤철상 형제들, 강화 제일 부자였지. 그런데 김재소씨가 이돈해씨를 당선시켰어. 이돈해가 달변가고, 김재소가 돈이 많고 하니 돈을 다 쓰고 했어. 근데 7대 국회의원(1967)을 할 때 처음에는 이돈해가 후보라고 플랭카드가 붙었는데, 아침에 보니까 김재소로 바뀌어 있더라고.

사업하는 사람은 사업만 해야 하는데 정치하는 건 안 되는 거야. 직물회사해서 모은 돈이 정치하는 바람에 다 없어졌어. 그때는 돈쓰는 판이니까선거하기 전에 최종근 회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데리고 강화에 왔어. 전국직물연합회장 하면서 청와대 들락날락할 때니까 헬리콥터타고 강화로 온 거지. 강화중학교 마당에서 헬리콥터가 뜨기 전에 강화기관장이 다 나왔는데, 박정희가 윤일상 동생인 윤옥상씨를 불러다가 김재소를 당선시켜라 했다는 거야. 윤씨네 조직이 크거든. 뭔 관계가 있는지 몰라도 그런 엄포를 놓았다는거지.

나중에 청와대 벽지도 심도직물에서 다 짜서 벽지를 도배했지. 그 양반이 국회의원이 되가지고 정치일이 바쁘니 회사일은 형님한테 일임하고 자기는 정치해야 하니까 잘 관리를 못하잖아. 하여튼 전국직물연합회가 밀어서 국회의원이 됐다는 얘기도 있고, 처음 하는 국회의원은 보사위원인가 뭔가를 했대. 그때는 회사를 많이 만들 때라서 청와대 들락날락하고 그러니까 회사일은 볼 수가 없지.

1968년도에 심도직물 여공들 파업이 있었어. 내가 들어가기 조금 전이야. 강화성당에 미국신부가 있을 때인데, 그때 강화경찰서 정보과장이 천주교 노동조합 타도시킨다고 야단하고 그랬지.

또 경도직물이 있어. 박영묵. 그이는 큰아버지도, 지 아버지도 공장을 했는데 작지도 크지도 않은 것을, 심도, 이화직물보다 작지만 개인으로는 크지. 아래 윗집이 넓어. 그런데 빨리 공장을 정리하고 세를 줬거든. 직물 공장은 점점 망해 가는데 잘 한 일이지. 지금 신아리랑 있는 자리 주위가 전부 경도직물 공장 자리야.

내가 생각해보니 그때 강화가 김포보다 나았거든. 김포는 별게 없었는데 지금은 다르지. 김재소가 거기 김포에 직물공장 지어준다고 하기도 했어.(두번째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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