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유산을 계승하는 강화문화 지킴이 ... 솔정리 고씨 가옥 ‘영섭재’ 후계자 고영한씨
위대한 유산을 계승하는 강화문화 지킴이 ... 솔정리 고씨 가옥 ‘영섭재’ 후계자 고영한씨
  • 글: 김세라, 사진: 나윤아
  • 승인 2019.01.17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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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정리 고씨 가옥 ‘영섭재’ 후계자 고영한씨

영어의 헤리티지(Heritage)는 자연, 사회, 문화 등 역사적으로 가치가 있는 인류 유산을 의미합니다.

선사시대부터 이 땅을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가 켜켜이 쌓여있는 강화야말로 헤리티지라는 단어가 잘 어울리는 고장이지요.

부침 많았던 근현대사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지켜낸 유서 깊은 고택 솔정리 고씨 가옥. 젊은 후계자 고영한씨와 강화의 위대한 유산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강화뉴스(이하 강화) 오래된 고택의 청년 종손이어서 놀랐습니다.
고영한씨(이하 고) 증조할아버지부터 4대를 이어온 고택을 물려받은 저는 30대 후반의 젊은이입니다. 6년 전에 영섭재의 소유주가 되었습니다.

강화 영섭재에서 나고 자라셨나요?
아주 어릴 적에는 미국에 살았고요, 유치원 때 한국으로 들어와서 서울에서 초, , , 대학까지 다녔습니다.

작은할아버지 내외분이 살고 계셨기 때문에 저 집을 제가 물려받을 것을 상상도 못 했죠.

강화의 3대 부자 집안이라 재산 배분 문제가 만만치 않았는데요, 작은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1년 전에 어려운 결단을 내려주셨죠.

그래서 영섭재를 제가 책임지게 되었습니다.

솔정리 고씨 가옥 '영섭재'
솔정리 고씨 가옥 '영섭재'

강화 영섭재 소개 부탁드립니다.
고조할머니께서 하도리 쪽에서 주막을 크게 하셨는데 약주 빚는 솜씨가 대단하셨답니다.

증조할아버지인 고대섭 옹은 고조할머니께서 모은 돈을 종자 삼아 양조장을 운영하셨죠. 소곡주, 청주, 막걸리를 제조했는데 제주도에서도 찾을 만큼 인기였대요.

증조할머니 치마폭에 담은 돈이 너무 많아서 은행에 일일이 입금도 못 하고 큰 독에 넣어뒀답니다. 장마 때는 독 안의 지폐에 곰팡이가 펴서 담벼락 햇볕에 말려야 했다는군요.

증조할아버지께서 개성을 오가면서 인삼재배까지 구상하셨는데요, 강화에 최초로 인삼을 경작한 두 분 중 한 분이 증조할아버지라는 기록이 만취회고록에 나와요.

증조할아버지께서 29살이셨을 때 개성 제일 갑부 저택을 다녀온 후, 젊은 혈기에 나도 저런 집을 짓겠다.” 다짐하셨죠.

1941년에 첫 삽을 뜨고 1945년에 준공이 나는데, 땅 다지기만 3년이 걸렸답니다.

강화 영섭재는 규모도 엄청나지만, 궁궐에서 볼 수 있는 건축 양식, 일본식 가옥, 서양식 구조까지 혼합된 독특한 전통가옥입니다.
대지는 450평이고, 건평이 99평인 55칸 집입니다.

궁궐 굴뚝(연가), 근대식 목욕탕, 다다미 다실, 서양 저택에서 볼 수 있는 방과 방을 연결하는 복도 등 당시 최고의 건축 양식이 총망라된 저택이었죠.

건축가들은 지하 난방시설을 손꼽아요. 땅을 깊게 파서 툇마루 아래에 방마다 아궁이를 두었는데요,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이 지하 공간에 독립 운동가를 많이 숨겨 주셨다지요.

이 집을 짓기 위해 증조할아버지께서 강화의 솜씨 좋은 목수는 다 불렀대요. 요즘으로 치면 목수 오디션을 본 건데요, 한쪽 구석에서 묵묵히 칼만 갈고 있던 목수를 뽑으셨답니다.

사업가로서 직관이 뛰어났던 증조할아버지의 선택이 옳았던 거죠.

건축 자재도 특급만 사용했는데, 고택 옆 파란 지붕 집은 100년이 넘게 고씨 가문과 가족처럼 지내는 이웃사촌입니다.

그 집 노 할아버지께서 건축자재 관련 사업을 하셨대요. 석모도에서 사괴석(육면체로 깎은 화강석)을 구해다가 궁궐처럼 담장을 세우고, 목재는 황해도에서 공수했답니다.

한밤중에 배로 나무를 날랐는데, 뱃머리에 도깨비불이 환하게 불을 밝혀줬대요. 그걸 본 사람들이 이 집은 더 큰 부자가 되겠네... 하셨다는군요.

동네 어르신들 말씀이 원래 이 집터는 도깨비가 놀던 곳이래요. 민담에 보면 도깨비가 재물을 주잖아요. 큰 재산은 모았지만, 풍수 좀 아시는 분들은 집터가 세다.’며 고개를 절레절레하십니다.

조왕신을 위해 부뚜막위에 올려둔 음식

강화 조왕신을 위해 부뚜막 위에 올려 둔 음식이 인상적이었는데, 그것도 이 집의 수호신들을 위해서인가요?
증조할아버지께서 무속신앙을 좋아하셔서 계절마다 굿을 하셨대요. 증조할머니께서는 그게 싫어서 보문사를 다니셨지요.

불사도 많이 하셔서 보문사 전각 중 한 곳은 증조할머니께서 지으셨다는군요. 보문사 범종에도 할아버지인 고장창 옹의 성함이 들어가 있어요.

집터 기운을 누르기 위해 집안 어른들이 굿도 하고, 열심히 절도 다니셨고, 70년대부터 40년간 이 집에 사셨던 작은할아버지께서는 목사님이셨거든요. 기도를 열심히 하셨답니다.

제가 이 집을 물려받은 이후에는 미신보다는 전통문화로 이해하고 조왕신을 모시거나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강화 어린 시절 영섭재에 대한 추억이 궁금합니다.
저는 부잣집 손주라는 인식이 전혀 없었어요. 어머니와 서울에서 무척 소박하게 지냈습니다.

증조할아버지 내외분도 검소하셨어요. 70년대 초반 일화인데요, 증조할아버지께서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강화읍까지 걸어 다니셨대요. 증조할머니께서도 고무신이 찢어지면 비닐로 수선해서 신으셨다고 하고요.

다만, 그 이후에 재산이 많은 집안이라면 으레 벌어지는 사건들을 겪으면서 형편이 어려워졌다고 합니다. 제가 어릴 적에는 살림이 크게 넉넉하지 않았어요.

방학 때 와도 영섭재가 워낙 커서 무서웠고, 숙조부님이 살고 계셔서 편하게 드나들지는 못했어요. 그래도 제가 오면 작은할머니께서 아궁이에 석쇠로 조기를 구워주셨는데, 그 맛이 일품이었어요.

2002년에 화재로 소실된 누마루 옆에 현관이 있었는데, 여닫을 때마다 낑낑거리는 소리가 났었어요. 그 소리가 생생하네요.

강화 갑부 후계자라고 하니 저를 돈 많은 한량쯤으로 여기는 분들도 계세요. 지정문화재다 보니 제약이 많아 경제적으로 어려워요.

제가 좋아해서 하는 일이기는 하지만 7년째 제 인생보다는 영섭재가 우선이었죠.

영섭재 제사
영섭재 제사

강화 인천시 지정문화재인데 지원을 받지 않나요?
문화재를 소유하고 있으면 재정지원을 받을 거라고 다들 오해하세요. 동네 분들도 그렇게 알고 계시더라고요.

서울이나 전주는 그렇다는데, 인천은 한옥 관련 조례가 없어요

우리 문화를 계승 발전시키겠다는 마음은 다들 있겠지만, 제도가 받쳐주지 못하는 실정이지요.

문화재로 묶여있어서 안 되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이 집 상속받고 내야 할 세금이 어마어마했어요. 빚으로 시작할 수밖에 없었죠.

조상님들이 도와주시겠지, 하면서도 어떨 때는 버티기 힘들어 원망이 들기도 해요. 상황이 벼랑 끝까지 몰리다가 겨우 급한 불만 끄는 식으로 근근이 버텼어요.

순리대로 가야 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아는데, 마음은 그렇지 않더라고요. 심란하면 108배도 하고, 정처 없이 걷기도 해요.

그래도 다행히 올해는 강화군에서 지원 예산을 배정했다는 기쁜 소식이 있어요. 다른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많지만, 한고비는 넘겼으니 또 힘을 내야죠.

강화 마지막으로 앞으로 계획 부탁드립니다.
전공이 미술이다 보니까, 아름다운에 대한 나름의 기준이 있어요. 주변 경관과 잘 어울릴 수 있도록 디자인하는 중이에요.

올 한 해 동안 누마루도 복원하고 주위도 깔끔하게 정리해서 2020년에는 고택 스테이로 개방하고 싶어요. 처음에는 앞이 캄캄했었는데, 많은 분이 응원해주셨어요.

도움 주신 분들 격려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강화의 전통을 잘 보존하고 계승하는 문화 지킴이가 되고 싶습니다. 앞으로 지켜봐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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