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3.1독립운동과 교회
강화 3.1독립운동과 교회
  • 인터넷 강화뉴스
  • 승인 2019.01.09 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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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이은용(사)강화3.1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이은용 사)강화3.1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이은용 사)강화3.1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원수를 용서하되, 잊지는 말자라는 말이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죄인을 일곱 번 씩 칠십 번이라도 용서하라”(마태복음 18:21)는 예수님의 말씀 따라 끝까지 용서하라는 천명을 지키며 산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1919년 일제에 의해 강제 합병된 이후 36년간 온갖 탄압과 고난을 당한 설움을 결코 잊을 수 없다. 용서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원수를 용서하라하신다. 더 나아가 사랑하라 하셨다. 이를 해석하면 민족의 원수(怨讐) 일제를 용서하되, 그 때를 잊지는 말아야 한다.’는 말이 된다. 단순히 망각하지 말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어찌하여 나라가 패망하였는지를 뒤 돌아보고, 다시는 전철을 밟지 말자는 말이다.

1919년 삼월 초하루,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온 민족이 일어나 독립만세를 불렀다. 서울의 3.1만세운동 소식이 강화에 전달된 것은 36일이었다.

탑골공원과 서울역 학생대연합 시위에 가담하였던 연희전문학교 황도문 학생이 독립선언서를 몸속에 품고 강화에 잠입하였다. 강화 길상면 선두교회 출신인 황도문은 그 길로 길직교회 유봉진 권사를 찾아가 서울 상황을 알리고, 강화에서도 만세를 부를 것을 건의했다.

즉시 유봉진 권사는 길직교회 이진형 목사에게 건의하였고, 39일 주일예배 후 길상지역 교회지도자들이 모여 비밀회합을 가졌다. 이날 회합에서 318일 강화읍 장날 전 강화군민이 참여하는 만세시위를 결정하였다. 그리고 비밀리에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인쇄하여 배포하고 만세 참여를 홍보하였다.

318일 오후 2, 강화읍 장날 2만여 명의 군중이 참여한 가운데 만세시위가 벌어졌다. 지방으로는 전국 최대 규모였다.

만세시위를 선두에서 지휘한 결사대장’(決死隊長) 유봉진 권사는 백말을 타고 나타나 수만 명의 시위 군중을 평화적으로 이끌었다. 일본 경찰의 시퍼런 총칼 앞에서 한 사람의 희생자도 없었다는 사실은 그의 탁월한 리더십을 말한다.

그러나 시위가 끝난 후 90여명이 일제에 체포되어 43명이 재판에 회부 되었고, 많은 가담자가 감옥살이를 하였거나 태형(笞刑)을 맞았다.

그중에 기독교인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시위대를 이끌었던 유봉진 권사를 비롯해 강화중앙교회 김유의 전도부인과 교인들 그리고 조봉암, 조구원, 오영섭 등 교회 청년들이 형벌을 받았다. 만세 시위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가 일제에 체포된 교인들은 주로 길상면의 길직교회 선두교회 산후교회와 화도면의 시온교회, 양도면의 흥천교회, 강화중앙교회 교인들이었다.

그 후 100, 우리는 그 혹독하고 쓰라린 아픔을 기억하고자 한다. 318일 강화읍 장터 만세시위가 있었던 그날, 만세시위에 많은 교인들이 가담하였던 그 강화중앙교회에서 삼일운동백주년기념행사를 개최한다.

이 기념행사는 기감 중부연회(박명용 감독), 강화4개지방 교회와 강화3.1운동기념사업회(이은용 이사장)가 공동주최하고, 연회 내 전 교인들이 참여하게 된다.

기념행사 진행은 오전 10시에 강화중앙교회에서 기념예배와 유명강사 초청 강연회를 개최하고, 오후 2시에 강화읍 용흥궁 공원 내 3.1독립운동기념비 앞에서 헌화와 만세시위 재연행사, 애국지사 후손 초청간담회 등의 행사를 갖는다.

 

다 오시라! 뜻 있는 자들은 모두 오시라! 와서 그 날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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