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천도 비운의 역사, 청산별곡을 잉태하다
강화천도 비운의 역사, 청산별곡을 잉태하다
  • 양태부
  • 승인 2012.07.31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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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와 고려가요 ‘청산별곡’

살어리 살어리랏다. 靑山애 살어리랏다
멀위랑 다래랑 먹고, 靑山애 살어리랏다
얄리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

현전하는 고려가요 중 <서경별곡>, <가시리> 등과 함께 백미(白眉)로 평가되어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수록되어 있는 <청산별곡>의 1장입니다.

<청산별곡>은 고려말 혼란된 시기에 창작되고 구전(口傳)되어 작자를 알 수 없는 노래이며, 1443년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 이후 문자로 정착되어 <악장가사>와 <시용향악보>에 실려 있습니다.

청산별곡과 관련해서는 지금까지도 연구자들마다 농토를 빼앗긴 농민의 노래, 사랑과 관련된 노래, 현실도피, 유랑인의 노래, 현실의 고뇌를 표출한 노래 등 다양한 해석을 내놓습니다.

그래서 <청산별곡>은 ‘누구나 알고 있는 작품’이면서 또한 ‘아무도 모르고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궁금증 속에서 필자는 <청산별곡>과 <강화도>와의 밀접한 관련성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얼마 전 강화도 뒷골목 서가의 한구석에서 그동안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했다는 듯 박혀있던 『강화천도, 그 비운의 역사와 노래』라는 제목의 책을 발견했습니다. 오늘 저의 글은 임주탁 교수의 책을 간략하게나마 재정리하는 일이 될 것 같습니다.

임주탁의 고려가요 연구

임교수께서 상기의 지난한 연구과정 끝에 내놓은 결과는 놀랍게도 아래와 같았습니다.

“(고려가요) 여섯 편의 노래가 생성된 시기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①  <서경별곡1> 고종 20년~고종 24년
②  <가시리> 고종 20년~고종 24년
③  <정석가 鄭石歌> 고종 24년 전후
④  <청산별곡> 고종 36년(1249) 전후
⑤  <한림별곡> 고종 38년(1251) 전후
⑥  <서경별곡2> 원종 10년(1269)
⑦  <만전춘별사>원종 11년~12년(1271)

위의 유명한 고려가요들이 모두 ‘강화도읍기 시절’(1232~1270)에 만들어졌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처음 듣게 되는 강화사람이라면 모두가 놀랄만한 결론이지요. 아래에서 저자가 인용한 많은 논거 자료들 중 몇 부분만 재인용하여 <청산별곡>을 다시 읽어보도록 하지요.

강화도읍 시절과 청산별곡

최이가 8일에 연등하면서 채붕(綵棚)을 만들고 기악(伎樂)과 온갖 잡희를 베풀어 밤새도록 즐기니, 성중의 구경하는 사녀들이 담장처럼 빙 둘러 서서 구경하였다. 기악과 온갖 잡희를 베풀고, 팔방상(八坊廂)의 공인(工人) 1천 3백 50여 명이 모두 호화롭게 단장하고 뜰에 들어와 풍악을 연주하니, 거문고와 노래와 북과 피리의 소리들이 천지를 진동하였다. 사신(史臣)이 말하기를, “팔방상(八坊廂)이란 것은 나라가 태평하였을 때나 있을 법한 성대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몽고 군사가 침략하여 해도(海島 강화)로 들어가 숨어 사직을 보전하고 있는 상태이니 진실로 군신이 걱정을 같이 하여 마치 못[淵] 위의 엷은 얼음을 밟고 지나가는 것처럼 두려워하고 조심하여야 할 터이다. 그런데 최이가 국가의 권력을 도둑질하여 망녕되게 사치하고 과장하며 조금도 두렵게 생각하거나 거리낌이 없으니, 죄가 진실로 죽어도 남을 것이다.” 하였다. <이상 한국고전종합DB ‘고려사절요’ 부분>

인용한 기사는 1245년 4월의 일이었는데 최이(우)가 초파일에 연등(燃燈)하였다는 기록이 보입니다. 이러한『악장가사』의 정보와 고종 36년(1249) 무렵이라는 역사시기를 바탕으로 추정하여 볼 때, <청산별곡>은 ‘몽골에 억눌린 시대’의 임시 수도인 강화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갈등하는 세 목소리’를 담은 ‘저항의 노래’라는 것입니다.

즉 청산별곡의 노랫말(원곡 전문 참조)은 강화천도 때부터의 고려정부의 정책인 ‘산성·해도 입보책’(山城海島入保策, 몽고침략을 당하여 산성이나 바다의 섬에 가서 숨어 있으라는 정책. 고려사, “遣使諸道 徒民山城海島”)에 의해, ‘청산과 바다’로 상징되는 공간에 계속 머무느냐? 아니면 ‘물아래와 애정지’로 상징되는 공간으로 가기 위해 청산과 바다를 떠나가느냐의 문제로 갈등하는 화자(A)와, 청산과 바다에 계속해서 머물기를 희구하는 화자(B) 둘 사이의 논쟁적 대화, 그리고 ‘물아래’나 ‘애정지’를 이미 경험한 화자(C)의 증언으로 구성된 노래라는 것입니다.

청산별곡 = 통합의 노래

마지막으로 임교수의 육성으로 이 단락을 맺도록 하겠습니다.

“<청산별곡>은 강화 중심의 국가 통합 체제가 현저한 위기 국면에 직면하는 고종 36년 무렵 이들을 통합하는 차원에서 제작된 노래로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이 글이 <청산별곡>을 비롯한 고려시대 시가 연구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어 줄 수 있기를 기대한다.”
 
시인 함민복, 청산별곡을 되살리다

<청산별곡>과 관련한 오늘 글의 마지막으로 강화섬에서 15년을 산 함민복 시인의 「나마자기」라는 현대시를 소개합니다. <청산별곡>을 공부하고 이제 다시금 함 시인의 글을 찬찬히 음미하자니, 이 시는 ‘강화문학의 전통’에서 필연적으로 만들어져야만 했던 노래인 것도 같습니다.  
 
나마자기

함민복

어찌 멸망(滅亡)의 빛이 이리 아름답다냐
뻘이 돋아지며 죽어가고 있다는
환경지표식물이라 했던가
뭍 쪽 붉음에서 바다 쪽 푸르름까지
색 경계 허물어 무지개밭이로구나
조금발에 뻘물 뒤집어쓰지 않아
빛깔 더 고운 나마자기야
너는 왜 해질녘에 가장 아름다운 것이냐
채송화 잎처럼 도톰한 네 잎 따 씹으면
눈물처럼 짭조름하다
뻘에 박혀 있던 둥근 바위 그림자
해 떨어지는 순간 너희들 위로
무게 버리고 길게 몸 펴며 달린다
바위 그림자 달리는 속도라니
소멸이 이리 경쾌해도 되는 것인가
깨줄래기 떼 그림자 투하하며 날자
칠게들 일제히 뻘구멍 속에 숨는다
얄리얄리 얄라셩-망조(亡兆) 든 나라 슬퍼
굴조개랑 너를 먹고 산다 했던가
나마자기야,
나마자기야,
어찌 유서(遺書)가 이리 아름답다냐

지난 보름 동안 임교수의 책을 읽으면서, 저는 제가 사는 ‘강화도의 문학전통’에 대해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보는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르는 체 무심코 지나친 강화도의 흙과 바람과 공기 속에, 우리들과 더불어 오랜 시간을 함께 호흡해 온 ‘시’와 ‘시인’들에 대해서도 새삼스레 고마운 마음을 느끼게도 되었습니다.

강화도에는 이규보, 최자, 이제현, 이색, 충지, 함허 등으로 이어오는 위대한 고려문학의 전통이 전해져 옵니다. 제가 결례를 무릅쓰고 소개드린 위 임교수의 논의가 학계에서 아직 정설(定說)로 채택된 것이 아닐지라도 한 20년 뒤에 학계의 정설로 인정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이와 같은 강화도 문학의 전통에, 널리 알려진 우리의 고려가요들을 자신 있게 덧붙여 소개할 수 있는 논리와 상상력을 갖게 되어 가난한 마음이 갑자기 부자가 된 듯 뿌듯하기만 합니다.

이 글의 원문은 ‘양태부의 강화도이야기(http://cafe.daum.net/rainbow-ganghwa)’에 있습니다. 지면관계상 발췌해서 실었습니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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