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경 흥왕사와 강도 흥왕사
개경 흥왕사와 강도 흥왕사
  • 인터넷 강화뉴스 편집부
  • 승인 2018.07.05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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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이미지: 정학수(인천역사문화센터 연구원)

고려는 불교국가였다. 태조 2년(919) 송악산 남쪽에 도읍을 정한 후 제일 먼저 행한 일이 궁궐을 짓고 관청을 설치하며 행정구역을 구분한 것이고, 두 번째로 한 일이 도읍에 10개의 절을 짓는 것이었다. 태조가 새 도읍 개경에 많은 절들을 한꺼번에 창건한 것은 ‘부처가 도와주는 나라’라는 것을 과시하여 민심을 안정시키고자 했기 때문이다.

성종 1년(982)에 최승로가 “부처의 가르침을 행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닦는[修身] 근본이요, 유교의 가르침을 행하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근원”이라 하여 유교이념에 따라 통치할 것을 건의했다. 태묘와 사직 등 유교적 문물제도 정비에 힘썼던 성종 때를 제외하면 태조 이래 개경과 경기에는 새로운 절들이 꾸준히 창건되었다.

광종은 재위 2년(951) 부왕과 모후를 위해 봉은사와 불일사를 각각 창건하여 원당(願堂)으로 삼았고, 현종은 재위 9년(1018)에 현화사를 창건하여 부모의 원당으로 삼았다. 역대 왕들이 부모의 원당 건립을 중시한 것은 원당을 통해 지지세력 결집과 불교계에서 왕의 영향력을 강화하려했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현종의 아들인 문종이 재위 10년(1056)에 개경 남쪽의 경기 군현인 덕수현의 치소를 옮기고 그 자리에 국력을 기울여 화엄종(華嚴宗)의 흥왕사를 창건한 것은, 한기문 교수에 따르면 국왕 자신의 원당으로 삼으려는 명분이었지만 현화사의 유가종단(瑜伽宗團)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고 한다. (한기문, 1998 『고려사원의 구조와 기능』, 민족사)

흥왕사는 12년에 걸친 공사 끝에 문종 21년(1067)에 2,800칸 규모로 완공되었고 3년 뒤에는 절을 보호하는 성도 쌓았다. 공사 기간 중인 문종 16년(1062)에는 흥왕사 창건이나 능묘 조성과 같은 경기 군현에서 벌어지는 각종 국가적 역사에 효율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개성현을 개성부로 승격시켜 경기를 효율적으로 통치하려고 하는 제도 개편도 수반되었다.

『고려도경』에 흥왕사는 “국성(國城) 동남쪽에 있으며, 장패문(長覇門)을 나서 2리 가량을 가면 앞으로 흐르는 시냇물을 만난다. 사찰의 규모가 매우 크다”고 하였다. 송나라 사람 서긍이 보기에도 흥왕사의 규모가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개경 나성에서 흥왕사까지 실제 거리는 2리가 넘는다.)

김부식은 「흥왕사 홍교원에서 화엄회(華嚴會)를 열며 올린 기도문」에서 “흥왕사는 문종 인효대왕(仁孝大王)께서 발원하여 창건하시어 불사(佛事)를 장엄하게 했던 곳이며, 대각국사(大覺國師)께서 교리를 널리 베풀어 큰 이익을 이룬 곳”이라 했다. 상주하는 승려가 1,000명이 넘고 금탑과 이를 보호하는 석탑 등이 있었던 고려전기 흥왕사는 김부식의 언급처럼 무엇보다 문종의 넷째 아들인 의천이 고려와 송, 요, 일본의 당대 불교를 총결집하여 속장경을 간행한 곳으로 유명하였다.

흥왕사에는 이후 최충헌의 뒤를 이어 집권한 최이가 고종 10년(1223)에 황금 200근으로 13층탑과 화병(花甁)을 만들어 안치하기도 하였다.

고종 19년(1232) 몽골과의 항전책으로 개경에서 강화로 천도하자 홍왕사도 강화로 옮겨온 것으로 보인다. 강도시기 덕수현의 흥왕사는 전란으로 완전히 불타버렸기 때문이다. 개경 환도 이후 흥왕사는 충숙왕 17년(1330) 복구되어,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 때 안동으로 피신했다가 돌아와 잠시 머무르기도 했다. 조선 초에는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개풍군 봉동면 흥왕리에 있는 흥왕사지는 1948년에 국립중앙박물관이 간단한 발굴을 실시했다. 이에 따르면 가람은 중심곽을 중심으로 그 좌우에 두 개씩의 또 다른 가람을 갖는 형식의 사찰이었다. 중심곽은 동쪽과 서쪽에 평면 8각의 목조탑을 배치하고, 그 뒷쪽 중앙에 금당, 금당 뒤에 규모가 큰 강당을 배치하였으며, 탑 남쪽 중앙에 있는 중문에서 동서로 뻗은 회랑이 북으로 구부러져서 강당 좌우 앞쪽까지 확인되었다. 중심곽 좌우에는 역시 문과 법당이 배치된 별도의 가람이 있었으나, 그들 건물에 대한 상황은 조사가 충분치 못하여 확실하게 밝혀져 있지는 않다. … 흥왕사 탑의 형식은 고구려의 기본적인 탑 형식인 평면 8각의 탑이나, 가람은 통일신라에서 보편화된 쌍탑식 가람 배치였다. (국사편찬위원회 『신편 한국사』 17, 252∼255쪽)

 

강도의 흥왕사는 『고려사』 등의 기록에는 확인되지 않는다. 하지만 김형우 교수는 “마니산 남쪽에 ‘흥왕리’라는 마을이 있고, 『속수증보강도지(續修增補江都誌)』에 그 마을의 흥왕사 터가 전해오고 있다. 화도면 흥왕리 구 흥왕초등학교의 동쪽 담장을 따라 동네에 들어가서 오른쪽으로 난 길로 산을 향해 올라가면 왼쪽의 계곡 건너편에 절터가 있다. 절터의 동쪽과 서쪽의 양쪽에 계곡이 흐르는 완만한 언덕에 3단의 축대로 경계가 구획되어 있다. 높이가 2m 이상 되는 거대한 축대와 계단석, 건물 기단부의 장대석, 초석 등이 곳곳에 남아 있다. 특히 중단과 하단 축대 사이에는 석탑의 옥개석과 갑석이 쓰러진 채 땅에 박혀 있어서 절터임을 확실하게 증명해 주고 있다”고 한다. (김형우, 2005 「고려시대 강화의 사원 연구」 『국사관논총』106) 

흥왕사지에서 서쪽으로 500미터 거리에 향토유적 13호로 지정된 고려이궁지가 위치하고 있는 점도 이 절터가 강도시기에 창건된 흥왕사였을 개연성을 더해주고 있어 관련성이 주목된다. 고려시대 도읍 일대 절들은 단순히 기도·수행공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군대 주둔지나 정치 모임의 장소, 별궁(이궁) 등 군사적 혹은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박윤진, 1998 「고려시대 개경일대 사원의 군사적·정치적 성격」 『한국사학보』3·4 참조 바람)

강화군 화도면 흥왕리 산39-1번지 일원에 있는 강도의 흥왕사지는 2009년과 2010년 인천광역시립박물관과 불교문화재연구소에서 각각 지표조사를 실시했을 뿐 더 이상의 학술조사나 유적 정비 없이 현재 방치되어 있다. 개경의 흥왕사지와 관련해서는 리창진·송광일의 「흥왕사 유적조사 보고」가 2012년 『조선고고연구』에 발표된 바 있다.

강도의 흥왕사지 구조가 개경의 흥왕사지 구조와 어떤 상관성이 발견된다면 이는 사찰구조 뿐만 아니라 개경과 강도의 도시구조의 상관성을 밝힐 단서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조속한 시일 안에 이를 위한 남북공동의 연구조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본 글은 인천문화통신3.0에 실린 글로 저자의 허락을 얻어 게재함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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