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세 번째의 풍수도시, 강화
우리나라 세 번째의 풍수도시, 강화
  • 인터넷 강화뉴스 편집부
  • 승인 2018.06.21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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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이기봉(국립중앙도서관 학예연구사) -

 고려사는 전한다. 1231829, 살리타이가 이끄는 몽골군이 압록강 가에 있는 의주인 함신진을 포위하였고, 평안북도의 철주(鐵州, 평안북도 철산군) 지역을 함락시켰다. 122일에는 개성 성곽의 서대문인 선의문 밖까지 쳐들어온 몽골군과 화친을 맺었다. 그리고 다음해인 1232111, 몽골군이 돌아가니 회안공 왕정, 재상 김취려, 대장군 기윤숙을 보내 위로하며 전송하였다. 고려에 대한 몽골군 1차 침략의 시작과 고려 정부의 항복 그리고 몽골군의 철수를 알려주는 간단한 기록들이다. 

그런데 몽골군이 돌아간 지 한 달 열흘 정도밖에 지나지 않은 220, 고려의 최고 관리들이 모여 수도 옮기는 것을 논의하였다. 몽골군이 철수했지만 언제 다시 침략해 들어올지 모른다는 위기감에 대한 대응 중의 하나가 천도(遷都)였던 것인데, 이때는 논의만 했지 결론을 내리지는 않았다. 그런데 몽골의 요구가 너무 심해지자 521일부터 몽골군을 방어하는 방법을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하였고, 이틀 후인 23일에 개성을 고수하며 몽골군을 막아내자는 다수파와 수도를 옮겨 피난하자는 소수파가 대립하였다.
 
그로부터 한 달 조금 안 된 616, 무신정권의 최고 권력자인 최우가 임금 고종을 협박하여 수도를 강화로 옮기기로 결정하였고, 다음 날부터 군대를 동원하여 강화에 궁궐을 짓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직 궁궐도 완성되지 않은 76일에 임금이 개성을 출발하여 강화도 맞은편의 승천부에 도착하여 하룻밤을 잤고, 다음 날인 77일 강화의 객사에 들어감으로써 공식적인 천도가 완료되었다.
 
1232616일부터 77일 사이의 21일 동안 이루어진 개성에서 강화로의 천도는 세계 최강 몽골군의 재침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정말 급하게 이루어졌다. 그러니 천도의 결정 다음 날인 617일부터 시작된 강화의 궁궐터 선정 또한 허술하게 이루어졌을 것이라 생각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하지만 궁궐터 선정에서만큼은 그렇게 허술하게 진행해서는 안 되었던 나라가 고려였는데,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조금 멀리 돌아가야 한다.
 
897, 후고구려의 임금 궁예의 명을 받은 왕건이 당시 사찰에 적용되던 풍수의 명당 논리를 적극적으로 채택하여 송악산 아래에 궁궐과 궁성을 만들었다. 이것은 당시까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던 풍수도시의 시작이었는데, 궁예는 얼마 지나지 않은 905년에 동아시아의 대제국이었던 당나라의 수도 장안을 닮은 철원도성을 만들어 천도하였다. 그런데 이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질 뻔 했던 풍수도시 개성이 극적으로 다시 살아났다. 918년에 역성혁명으로 고려를 세운 태조 왕건이 다음 해에 개성으로 천도하였고, 936년에 후백제의 신검 군대를 격파하여 후삼국의 통일을 완성하면서 우리나라 유일의 수도가 되었다. 이후 고려에서는 수많은 외침과 내부 반란이 있었음에도 임금과 관련된 공간인 궁궐과 수도 등의 조영에 풍수의 논리를 신성불가침한 기준으로 삼는 임금풍수가 멸망할 때까지 유행하였다.
 
풍수면 풍수지 굳이 임금풍수라는 말을 사용한 것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하는 우리나라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런데 이유가 있다. 고려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임금과 관련되지 않은 도시의 조영에는 풍수의 논리가 전혀 적용되지 않았다. 이런 사례는 부지기수이지만 고려시대에 만들어져 조선에 들어와서도 옮겨가지 않은 대표적인 도시들을 가보면 누구나 쉽게 수긍할 수 있다. 충청도 이름의 유래가된 충주읍성과 청주읍성, 전라도 이름의 유래가 된 전주읍성, 경상도 이름의 유래가 된 경주읍성과 상주읍성, 강원도 이름의 유래가 된 원주의 옛 중심지 모두 풍수의 명당 형국과 아무런 관련 없는, 북쪽으로 탁 트인 허허벌판의 평지에 남향하여 들어서 있었다. 풍수가 지방 고을의 중심도시 조영에 핵심 논리로 적용되기 시작한 것은 조선, 그 중에서도 4대 임금인 세종(재위: 1418~1452) 때부터이다.
 
고려사1232716일 개성에서 강화로의 천도가 급하게 결정되었고 다음 날부터 강화에 궁궐을 짓기 시작했다는 것 이외에 다른 내용을 전하지 않는다. 하지만 고려란 나라에서 궁궐과 그것을 중심으로 한 임금의 도시인 수도의 건설에는 아무리 급해도 무조건 풍수가 적용되어야 한다는 역사지식을 갖고 있다면 강화에 짓는 새로운 궁궐은 풍수적으로 최고의 명당 터를 선정하여, 더 쉽게 말하면 개성의 만월대 궁궐과 비슷한 터를 선정하여 만들어야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때 그렇게 선택된 곳이 바로 강화읍 관청리의 고려궁궐터다.
 
고려궁궐터에 서서 사방을 바라보라. 이때 너무 어렵게 생각하여 전문가의 눈을 빌리려고 하지 마라. 원래 풍수에서 최고로 여기는 명당 터는 전문가의 눈에만이 아니라 비전문가의 눈에도 분명하게 보이게 되어 있다. 고려궁궐터에 서면 풍수의 간단한 논리만 알고 있는 평범한 사람의 눈으로 보아도 뒤쪽인 북쪽의 주산(송악산)을 중심으로 서쪽과 동쪽으로 뻗어 내린 좌청룡과 우백호의 산줄기, 그리고 남쪽에 솟아난 안산(남산)의 흐름이 너무 분명하다.
▲ 고려 궁궐터의 풍수 형국
이미 앞에서 말했지만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풍수도시는 개성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의풍수도시는 1067년 양주에서 임금의 도시로서 남쪽의 수도란 뜻의 남경(南京)으로 승격시킨 지금의 서울성곽 안이었다. 원래 양주의 중심지는 아차산성 남쪽인 서울시 광진구의 광나루 부근에 있었는데 풍수의 명당 논리에 합당한 지형의 서울로 옮기면서 남경으로 승격시킨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의 풍수도시가 바로 개성에서 천도하여 새로운 임금의 도시로 만든 고려궁궐터 일대의 강화 읍내다.
 
어떤 이는 강화의 중심지가 옛날부터 강화읍내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고려시대에 풍수는 임금의 권위를 표현하는 신성불가침한 논리였기 때문에 임금과 관련되지 않은 도시에 풍수를 적용한다는 것은 반역이었다. 개성에서 강화로의 천도가 확정된 1232616, 강화도에는 북쪽으로부터 하음·강화·진강이란 세 개의 고을이 있었다. 그리고 강화의 영역이었던 불은면 삼성리의 습진벌에 강화의 옛 이름과 같은 혈구군터(또는 혈구진터, 해구군터)가 있었다고 전해지는 한국지명총람의 기록을 무심히 넘겨서는 안된다.
▲ 강화 고을의 추정 중심지와 강화읍내
 혈구군터 바로 서북쪽에는 동일한 이름의 혈구산이 있는데, 전국적으로 고을의 옛 이름과 같은 산아래에 고을의 옛 중심지가 있는 사례는 많다. 전국의 거의 모든 고을을 살펴보았던 필자의 지식으로 보면 1232616일 강화로의 천도가 결정되기 전 강화의 중심지는 불은면 삼성리의 혈구군터에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궁궐을 짓기 시작하려고 풍수의 명당 터를 잡을 때 개성의 만월대 궁궐터와 가장 유사한 강화읍내의 고려 궁궐터가 선정된 것으로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고려사지리지의 강화현에 적혀 있는 고을 중심지[] 동쪽 10리의 송악리에 옛 궁궐터가 있다(府東十里松嶽里 有故宮基)’란 문구를 소개하겠다. 여기서 옛 궁궐터는 지금의 강화읍내에 있는 고려궁궐터를 가리키기 때문에 이 기록에서의 고을 중심지는 강화읍내가 아니다.
 
1270년 강화에서 개성으로 수도를 다시 옮긴 후 몽골은 고려가 강화에 다시 들어가 항거하지 못하도록 만들기 위해 강화의 옛 수도를 철저하게 파괴하였다. 더불어 강화는 더 이상 고려의 수도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 중심도시가 풍수의 명당 터에 계속 있어야 할 명분도 사라졌다. 그렇다면 강화의중심도시는 더 이상 강화읍내에 있지 않고 다른 곳으로 옮겨갈 수밖에 없는데, 그런 상황을 알려주는 기록이 바로 고을 중심지 동쪽 10리의 송악리에 옛 궁궐터가 있다는 앞의 문구다.
 
한국지명총람에는 강화읍내의 서쪽 지역인 내가면 고천리의 고비마을에 심주(沁州) 고을이 있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여기서 심주는 강화를 가리키는데, 그곳을 기준으로 하면 강화읍내의 고려궁궐터가 동쪽 10리에 있다고 서술할 수 있다. 이런 결과를 토대로 보면 1270년 강화에서 개성으로 환도한 후 강화의 중심도시가 강화읍내에서 혈구산 서북쪽 내가면 고천리의 고비마을로 옮겨갔고, 풍수의 명당 논리가 지방 고을의 중심도시에 적극적으로 적용되던 조선에 들어와 다시 풍수의 명당 터로 알려진 강화읍내로 옮겨왔다고 볼 수 있게 된다.(본 글은 인천역사통신 제17호에 실린 글로 인천역사문화센터의 허락을 얻어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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