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공주(貞明公主)를 찾아서 Ⅱ
정명공주(貞明公主)를 찾아서 Ⅱ
  • 양태부
  • 승인 2012.07.11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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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공주의 음덕과 예술적 천분, 육진팔광의 귀한 손을 내리다
지난 호에서 약술한 가계도에서 이경직(李景稷, 1577~1640)과 아우인 이경석(李景奭, 1595~1671) 때부터 덕천군파는 소론(少論)이 되었습니다. 이경석은 청태종 기공비인 ‘삼전도비문’을 지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아직 소론이 정권을 잡고 있을 때 덕천군파 가문은 장안에 제일 잘 나가던 집안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경직의 손자인 이대성은 벼슬이 참판이고 선조의 외동딸인 정명공주의 맏손녀와 결혼하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장인은 판서 홍만용이고 그는 알아 보았듯이 정명공주의 장자입니다. 
 
정명공주는 이대성을 특별히 아끼고 갸륵히 보았을 것 같습니다. 공주로서는 이대성이 처음 맞는 맏손자사위가 아니었겠습니까? 훗날에 이 손녀딸은 전주이씨 집안에 시집가서 아들을 낳고, 그녀는 자기 손자 중에서도 특별히 재주가 많은 이광사(李匡師, 1705~1777)에게 또 한석봉체를 가르쳤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광사의 원교체(圓嶠體)는 유명한 글씨인데, 원교는 스승인 하곡 정제두의 맏조카사위(정제두 동생 정제태의 맏사위)인 백하 윤순(尹淳, 1680~1741)에게도 글씨를 배워 나중에 ‘동국진체(東國眞體)’를 완성하였던 인물입니다. 원교가 스승 윤순에게 자신이 글씨를 배운 할머니의 할머니인 정명공주 이야기를 들려주었더니, 나중에 백하가 정명공주의 유묵(遺墨)이 혹시 남아있나 고려산 적석사에 갔다가 ‘적석사사적비(積石寺事蹟碑, 1714)’나 하나 써주고 내려왔는지도 모르지요.(기록에 없는 저의 상상입니다.) 그러나 여기 사기리에 누워계신 이대성과 그의 부인 풍산홍씨에게서 뒷날 ‘육진팔광(六眞八匡 : 이대성 차대의 족친 ‘眞’자 항렬 6명과 ‘匡’자 항렬 8명이 모두 詩·文·書·畵 에 능해 이를 부르는 별칭)의 귀한 자손들이 마구 쏟아져 나왔으니, 제가 “이는 모두 우리 정명공주님의 음덕(陰德)과 예술적 천분의 내림이다.”라 말한다고 해서, 저의 상상이 과하다고 어느 누가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가계에서 또 다른 한 분인 영빈김씨(寧嬪金氏, 1669~1735)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찾아보니 영빈은 이대성의 어린 누이동생이 김상헌의 안동김씨네로 시집가서 낳은 딸이므로 이대성의 조카딸이 되는 분입니다. 이 분은 숙종의 정비 인현왕후 민씨가 자식이 없자 나이 18세에 숙종의 후궁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영빈은 인현왕후와 밀접한 관계인 서인(西人)가문이었던 탓에 인현왕후가 폐출될 때 같이 폐출되고 1694년 인현왕후가 복위될 때 또 함께 복위된 분입니다. 남인(南人)인 장희빈 세력들과의 권력투쟁과 갈등이 극심했습니다. 
 
영빈김씨의 생애에서 특기할 점은 무수리 최씨가 자신의 천한 신분으로는 자기 아들(연잉군, 뒷날의 영조)이 보위에 오르지 못할 것을 미리 알고, 연잉군을 영빈에게 양자로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록 양자이긴 하지만 영빈은 영조임금의 어머니가 되시는 분이지요. 
 
민주주의 시대인 현대에도 대통령의 아들들과 그 가족들의 권세란 우리 같은 서민과 범인들이 감히 상상도 못할 바인데, (오죽하면 ‘萬事兄通’이란 말이 있겠습니까?) 이 시대가 절대왕권시대였음을 예상하여 보자면, 저는 조선 중기의 어떤 한 시절에 덕천군파의 <이정영-이대성 父子>가 왕의 척족으로서 누린 권력과 세도를 능히 짐작하고 남을 것도 같습니다. 
 
그러나 권력은 무상합니다. 이런 권세도 잠시였을 뿐, 아들인 이진유가 연좌된 이광명 이광사 이광현 대의 어떤 사건(1755, 을해옥사)으로, 사랑하는 손자들이 멀리 함경도 경상도 전라도로 귀양을 가게 되니, 이로써 강화도의 덕천군파 집안들은 가학(家學)으로 내려오는 양명학을 공부하며 길고 오랜 세월을 견뎌가야만 했습니다. 이대성 아래 7대(이진위~이건창)의 ‘학문의 내림’을 후세사람들은 ‘강화학(파)’라고 부르며, 그 개략적인 맥락은 제가 전번에 이 나들길 카페에 올린 <난곡 이건방 ‘강화학파’를 찾아서>를 참고하실 수 있습니다. 
 
▲ 화도면 사기리 이건창 생가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에 있는 ‘이건창생가’는 영재 이건창만의 생가가 아닙니다. 병인양요(1866) 때 자결한 이시원·이지원형제의 생가이며, 더욱 더 거슬러 올라가 왕과, 공주와, 왕비와, 척족과, 학문과, 의로움과, 절개와, 역사와, 문학과, 철학 등이 집약적으로 압축되어 있는 <강화인문학의 生家>라고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생가(生家)의 ‘生’이라는 단어에 더욱 절실하게 의미를 붙여 현재진행형의 ‘생성(生成)의 문화 Culture of Becoming’로 말씀드리자면, 이형주 이은달 두 분 덕천군파 후손께서 조만간 ‘이대성신도비’를 세우면 가까운 분들을 모시고 ‘추모제(追慕祭)’를 모신다고 합니다. 
 
또 한 가지! 어쩌다 알게 된 강화도와 관련된 작은 에피소드(episode)를 하나 말씀드리렵니다. 왕이 왕 되기 전에 살던 곳을 잠저(潛邸)라 하는데 영조 잠저는 창의궁(彰義宮)이었습니다. 영조가 연잉군(延仍君)이었던 시절에 부왕인 숙종왕이 사서 내려 주었지요. 숙빈 최씨가 말년에 이곳 창의궁 아들집에 와서 사망하였고, 일찍 죽은 효장세자(사도세자의 형)와 화순옹주가 태어난 곳이기도 한 사연이 깊은 궁입니다. 아무튼 연잉군은 창의궁에 살다가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 창의궁과 강화도와의 관계는? 창의궁은 원래 숙종의 할아버지인 효종의 4째 사위 인평위 정제현(鄭齊賢, 1642~1662)이 살던 집이었습니다. 정제현은 효종의 부마로 강화학파의 비조 하곡 정제두(鄭齊斗, 1649~1736)의 유일한 사촌형입니다. 숙종으로 보자면 정제현은 아버지(현종)의 고모부이니 왕고모부(王姑母夫)인 셈이네요. 이렇게 강화도의 영일정씨 정제두선생의 집안도 왕실과 인척이 되고 있습니다. 어떤 역사적인 의미는 없을지라도, 영조의 창의궁에 정제현과 관련된 이런 인연이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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