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공주(貞明公主)를 찾아서
정명공주(貞明公主)를 찾아서
  • 양태부
  • 승인 2012.06.19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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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공주의 생애와 예술

정명공주는 선조와 인목왕후 연안 김씨(김제남의 딸, 1584~1632) 사이에 태어난 유일한 공주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던 공주는 광해군 5년의 계축옥사(1613)로 인목대비가 서궁에 유폐될 때 함께 유폐되어 인조반정(1623)까지 만10년을 덕수궁에 갇혀 살았습니다.

11세 때 갇힌 공주는 다음해인 1614년에 동생인 영창대군이 지금의 강화도 살채이(살채이의 지명은 殺. 昌. 즉 ‘영昌대군이 殺해 당한 곳’이라는 뜻)에서 증살되었고, 외할아버지 집안까지 완전 쑥밭이 되었으니 정명공주는 꽃다운 소녀시절을 어머니 인목대비를 위로하며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 기나긴 세월을 보냈을 것입니다.

고통과 불안을 잊는 방법으로 공부하는 일이 최선이었을까? 정명공주는 명필이던 인목대비로부터 글씨를 지도받으며 서도(書道) 수련에 매진해 유폐 기간 중에 이미 한석봉체의 대가가 되었습니다.

한편 반정으로 왕에 오른 인조는 인목왕후와 정명공주를 잘 모셔야만 반정의 명분이 확고하게 되므로 이 두 모녀를 극진히 모셨습니다. 인조는 반정 바로 그 해인 1623년에 이미 혼기를 놓쳐 있던 21세의 정명공주를 영안위(永安尉) 홍주원(洪柱元)에게 하가(下嫁, 공주나 옹주가 귀족이나 신하에게로 시집가는 일)하였습니다.

정명공주는 1637년 병자호란 때(35세) 강화도로 피난 와 고려산 적석사에 피신해 있었다는 기록이 ‘강화사’에 있습니다. 피난 당시 갑곶나루로 건너려할 때 미리 공주의 금은보화를 실은 배가 기다리고 있자 “재화들을 다 내리고 백성들을 먼저 배에 태우라!”고 명하자 이를 본 사람들이 “과연 정명공주로다. 공주의 마음씀이 저러하니 그 아래 후손들이 반드시 번창할 것이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백성들의 마음이 통했는지 공주는 7남 1녀의 많은 자손을 두며 다복번창(多福繁昌)했습니다. 또 장자인 홍만용(洪萬容, 1631~1692)은 훗날 숙종조에 이조판서와 예조판서 등 고위직을 두루 지냈으니 또한 어머니를 극진히 모셨음을 더불어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공주께서는 당시로는 드문 장수를 누렸고, 시집올 때 인조가 많은 땅을 내려 돌아가실 때 남긴 재산이 전라도 하의도 섬 전체와 땅 8,000만평이었다는 말도 있습니다. 정명공주의 이 재산은 두고두고 풍산홍씨 가문의 밑천이 되고도 남았을 것입니다.(후대의 그의 후손으로는 홍양호, 홍국영, 영의정을 지낸 홍봉한과 딸 혜경궁홍씨, 홍범식 등등 수많은 인물들이 있으며, ‘임꺽정’ 소설을 쓴 현대의 벽초 홍명희도 정명공주의 자손)

여기 정명공주의 서예작품으로 한석봉체의 ‘華政’(간송미술관 소장) 두 글자를 살펴보겠습니다. 화정은 ‘빛나는(華) 정치(政)가 백성을 편안히’라는 속뜻으로 사방 73cm 나 되는 큰 글씨입니다.

이 글씨에 대해 미술사가들은 ‘이런 큰 글씨는 남자의 필력으로도 감당하기 힘들진데, 연약한 여인의 체력으로 이런 글을 써냈다는 것은 놀라운 일’ ‘중국에도 유례가 없다’ ‘결구(結構)나 필력(筆力), 운필(運筆)에 있어 어느 한 군데의 머뭇거림 없이 당당하기만 하니 타고난 명필이 아니고선 불가능한 일’이라고 평합니다.

사기리에서 만난 정명공주

지난 5월 7일(월) 반가운 두 분이 찾아오셔서 함께 식사를 하고 화도면 사기리의 ‘이건창생가’에 다녀왔습니다. 한 분은 영재 이건창의 증손자이신 이형주님이시고, 처음 뵌 또 다른 한 분은 전주이씨 덕천군파 문중의 이은달이란 분이었습니다.

이은달 님은 문중 종회(宗會)의 조상을 받드는 일을 맡아, 벌써 충정공 이시원과 참판공 이대성의 묘에 둘레석과 혼유석, 망주석을 다시 모셔서 선조의 뜻을 선양하는데 사재를 쾌척하고 계신 분입니다.

저도 오랜만에 사기리에 와서 보니 과연, 두 분의 묘 주변이 갈끔하게 사초(莎草)되고 상석들이 새로 놓여져 있더군요. 감사하고 존경하는 마음이 절로 들었습니다. 이래야 하지요. 후손이면 마땅히 이래야 합니다. 두 분께서 강화에 오신 이유는 이대성공의 신도비(神道碑)를 세우기 위해서 강화군청에 관련사항을 점검하기 위해서랍니다.

알아보았더니, 아무리 문중 소유의 땅이라도 ‘이건창생가’가 이미 문화재(인천시기념물 제30호)로 지정되어 있으니 인천시나 강화군청의 형상변경허가를 맡아야한다고 합니다. 신도비 모실 자리를 돌아보다가 제가 먼저 궁금한 일을 여쭤보았습니다.

“이은달 선생님은 덕천군파에서 어느 분의 자손이 되는지요?”
“이(李) 문(文)자, 익(翊)자, 할아버지입니다. 강화입향조인 이광명님이 자손이 없어 사촌인 이광현님의 둘째아들인 이충익을 양자로 입양하셨는데, 저는 이광현의 장자인 이문익의 자손이지요.”
(이광현! 저는 이 분의 묘자리를 이건승의 『가승』 책의 지도를 들고 찾아본 적이 있었습니다.)
“이광현의 묘를 제가 아는데... 찾아본 적이 있으세요?”
  “그럼요! 수년전에 집안 족보를 보니 외포리 어디라고 해서 지관(地官)을 데리고 한 이틀 헤메었었죠. ...결국 못 찾았습니다.”
“오늘은 약속이 있으시다니, 다음에 오시면 제가 모시겠습니다. 그런데... 봉분도 없고 그저 묘의 자리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광현의 묘는 포크레인으로 파묘된 뒤 무덤조차 자취가 없고, 이제 기록으로만 남아 있습니다.)

이광현 묘지에 대한 저의 개략적인 설명을 듣던 이선생님의 눈가에 잠시 눈물이 비쳤습니다.

“그런데, 이대성공 신도비의 비문은 어떻게 하나요?” 저는 화제를 얼른 돌렸습니다.
“그건 일전에 맞춰 놓았어요. 새로 글을 만들려면 비용도 들고... 돌아가신 후에 누군가 써 놓은 것을 문중 어른이 서울 규장각에서 찾았답니다. 이대성 할아버지는 벼슬도 높으셨고, 정명공주 후손과 결혼하신 분이신데, 누군지 모르지만 당대의 문장가가 비문을 썼겠지요. 그런데... 양선생은 ‘정명공주’라고 들어보셨어요? 선조임금 외동딸인데.”
(저는 위에 적은 대로 정명공주를 조금 알고 있었습니다. 아, 그 정명공주라니~)
“예, 조금 아는데요. 혹시 정명공주와의 관계가 나와 있는 족보를 좀 빌려볼 수 있습니까?”
“그거 인터넷 들어가니까 다 나오던 걸요. 여러 곳을 뒤져 한 번 찾아보시면 될 것 같네요.”
(저는 숙제를 안고 다시 강화읍으로 들어 왔습니다. 5월의 햇살이 여름날처럼 따가웠지만, 제 머리 속에는 온통 정명공주 생각으로만 가득했습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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