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에 가려진 노동의 역사’-강화 심도직물 노동조합 사건
‘성장에 가려진 노동의 역사’-강화 심도직물 노동조합 사건
  • 최보길
  • 승인 2012.06.19 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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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보길의 발로새긴 강화역사 이야기

고3 아이들과 진로상담을 하면서 삶의 지향과 직업 선택, 그리고 거기에 따른 진학문제를 함께 묶어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어떠한’ 삶을 ‘어떻게’ 살 것이며, 그러기 위해 지금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를 묻는 과정이었다.

아이들의 의견이 정리될 무렵 나는 그들의 부모님들을 만난다. 아이의 결정에 대해 물어보면 부모님들은 ‘아이가 원하는 것, 아이가 하고 싶은 것’을 지지하고 후원하겠노라 말씀하신다. 어른들의 입김으로 진로가 결정되던 시대와 비교해보면 ‘지원과 협력’의 관점에서 자녀를 만나고 있으니 참으로 다행이다.

그런데 한 가지 걱정이 있다. 지금처럼 비정규직 문제가 심화되고, 감각적인 대중문화에 노출되어 있고, FTA로 농업이 무너지는 상황에서 아이들이 하고 싶은 것, 원하는 것은 아마도 ‘땀’ 흘리는 일보다는 ‘편안하고 편리한 일’에 가깝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다. 그런 면에서 ‘아이가 원하는 것, 아이가 하고 싶은 것’에 더하여 ‘기꺼이 땀 흘릴 수 있는 일’에 대한 가치를 강조하고 싶었다. 그런데 땀 흘리는 것은 아이의 몫이지만 ‘기꺼이’를 받아들일 수 있는지에 대해선 망설이게 된다. 그것은 ‘왜 기꺼이 땀 흘릴 수 없는지’에 대하여 나부터도 그 근원적 답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일한만큼 대가를 받으면서도 경제적 가치보다 자신의 삶을 가치 있게 가꾸어 가는데 걸림돌이 되었던 사회 환경을 나를 포함한 부모 세대들은 제대로 바꾸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국 노동의 역사 보여주는 심도직물

오늘 ‘발에 새긴 강화 역사’는 ‘기꺼이 땀 흘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갔던 강화 사람들의 노력, 강화 심도직물 노동조합 사건의 현장을 찾아간다.

강화는 한때 대구(섬유), 수원(나일론) 과 함께 3대 직물도시였다. 대구와 수원의 도시 규모를 생각해보면 강화의 직물산업 발전은 특이한 현상이었다. 1960년대 강화 직물공업을 이끌던 대표적인 회사가 바로 심도 직물이었다. 심도직물은 전성기에 1,200여명의 노동자가 일했고 파산되기까지 총 15,000여명이 종사하였다. 현재 강화도의 인구가 약 6만임을 가정하면 심도직물의 경제적 효과가 강화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 성장의 혜택이 공평하였을까? 지금 할머니가 되어버린 여공들의 기억 속에는 일주일에 휴일 없이 하루 12시간의 격무와 노동자 60%가 앓고 있는 위장병, 결핵에 대한 두려움이 남아있다.

당시 심도직물 여성노동자는 이러한 노동 현실을 떨쳐내고자 여성노동조합을 조직하여 저항했다. 일제 강점기에서부터 노동운동을 탄압했던 치안유지법이 해방 이후에도 반공법으로 이어져 노동조합운동이 쉽지 않았던 때에, 심도직물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은 ‘기꺼이 땀 흘릴 수 있는’ 일터를 만들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때 연대의 손길이 닿았다. 자신들이 믿었던 신앙과 그 안에 흐르는 정의에 대한 의지로 가톨릭노동청년회가 강화도 직물노동자의 아픔에 관심을 가지고 다가갔다. 그러나 회사 측은 조합원 2명을 해고하고 공장을 폐업시켰다. 강화도 소재 21개 직물회사는 150여명의 노동자를 동원한 심도직물노조 반대 시위, ‘가톨릭노동청년회 회원’에 대한 고용거부, 천주교 인천교구장을 통한 강화읍 성당 성직자 교체요구 등 심도직물 노동쟁의를 다각도로 탄압하였다.

그러나 천주교 인천교구는 담화문을 통해 사회정의를 위해 활동하는 가톨릭노동청년회의 입장을 옹호하고 나섰다. 이는 천주교가 그동안의 갇혀있던 정교분리의 원칙을 넘어 사회 참여, 특히 노동현실에 대한 참여를 선언한 전환점이 되었다. 여기에 얼마 전 선종하신 김수환 추기경이 중심이 되어 심도직물 사태에 대한 ‘사회정의와 노동자의 권익 옹호를 위한 주교단 공동 성명서’를 발표하였고, 마침내 정부로 하여금 사태수습에 나서도록 만들었다.

이로써 ‘해고자 전원복직’과 강화직물협회의 노동조합 탄압에 대한 ‘해명서’ 발표로 강화도 섬유노동조합 사건은 마무리 되었다.

변화를 위한 씨앗 - ‘참여와 연대’

강화의 직물여공들의 투쟁과 종교인의 참여는 분명 ‘씨앗’이었다. 이 씨앗은 ‘스스로의 자각’과 ‘이웃과의 연대’가 서로 만나면서 이후 동일방직 여성노동자들의 투쟁, YH무역사건 등으로 꽃 피웠다.

이 사건은 경제 성장의 뒷면에 감춰진 노동 문제,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고통을 받았던 여성 노동자들의 저항과 인간 선언의 역사적 출발점이 된 것이다.  지금은 심도직물 굴뚝의 일부를 잘라 강화 용흥궁 공원 내에 강화도 근대화의 상징으로 <심도직물 상징탑>이 남아 있다.(사진) 우리는 그 앞에서 지금의 현실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그 곳을 내려다보고 있는 강화읍 천주교 성당의 예수상을 바라보며 심도직물 굴뚝에 피어올랐던, 지금은 할머니가 되어버린 어린 여공들의 아픔을 따뜻하게 품어주고, ‘기꺼이 흘릴 수 있는 땀’을 만들어준 사제들의 ‘연대의 마음’을 떠올린다. 지금도 우리 사회 어디선가 또 다른 노동자들의 절규가 들린다. ‘참여’와 ‘연대’로 달구어진 따뜻한 품이 그들에게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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