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고 곧은 선비정신을 실천하는 강화의 지성인 - <남궁내과> 남궁호삼 선생님
맑고 곧은 선비정신을 실천하는 강화의 지성인 - <남궁내과> 남궁호삼 선생님
  • 김세라
  • 승인 2016.09.09 22: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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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고 곧은 선비정신을 실천하는 강화의 지성인 - <남궁내과> 남궁호삼 선생님

 

뜨거운 한여름, 하늘 높은 곳까지 기어이 꽃을 피우는 ‘능소화(凌宵花)’를 아시나요? 선비의 기개와 품위를 지녀 ‘양반꽃’이란 별칭으로도 불리는데요, 장원급제자의 화관에 꽂을 만큼 유학자들의 사랑을 받았다고 합니다. ‘드높은 명예’를 상징하는 ‘능소화’처럼 대를 이어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모범을 만들어 가는 명사가 있다고 해서 찾았습니다. 강화읍 <남궁내과>의 남궁호삼 원장님을 지금 만나봅니다.

 

강화뉴스(이하 강화) 병원 벽을 타고 활짝 핀 능소화가 참 아름다워요.

남궁호삼(이하 남궁) 오래 전, 어머님께서 심으셨어요. 반상의 구분이 엄격했던 시절에는 오직 양반가에서만 가꿀 수 있었다고 합니다. 저희 집안이 500년 넘게 강화 땅에서 유학을 공부했습니다.

강화 아버님이신 남궁택 원장님께서도 이 자리에서 병원을 운영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남궁 원래는 <남궁의원>이었는데, 저와 막내 여동생이 이어받은 후에 <남궁내과>로 변경 했습니다.

강화 의사가 되기까지 아버님의 영향을 많이 받으셨을 것 같아요.

남궁 가톨릭 사제가 되려 했어요. 성당에서 신부님의 미사전례를 돕는 복사 활동도 열심히 했거든요. 그런데 어머님께서 갑자기 복사를 못하게 하셨어요. 나중에 알았는데, 제가 진짜로 사제가 될까봐 걱정하셨답니다. 의사가 된 후 사제서품을 받으려 했는데, 입학하니 예쁜 여학생이 많더군요. 신부의 꿈을 포기했습니다. (웃음)

1988년에 개업을 위해 고향으로 돌아올 때 두 가지 목표가 있었어요. 첫째, 좋은 의사로 인정받자, 둘째, 실천하는 지성인이 되자. 대학생 때 교수님께서 ‘위대한 의사’ 말고 ‘굿닥터’가 되라고 하셨어요. 뛰어난 의술도 중요하지만, 환자가 바라는 것은 ‘따뜻한 의사’라는 뜻이에요.

환자나 보호자는 믿고 상의할 의사를 원해요. 강화로 돌아올 때, 몸이 아픈 주민들의 첫 번째 의논상대가 되자고 다짐했죠. 몇 달 후에 드디어 ‘남궁원장은 좋은 의사’라는 칭찬을 들었어요. 반면 ‘실천하는 지성인’이 되기는 훨씬 어렵더군요.

강화 선생님 말씀 들으며, 나는 과연 ‘참된 실천 지성’을 생각 해 봤는지 묻게 됩니다.

남궁 막 강화에 돌아온 후, 이런 저런 지역사회의 문제점들이 눈에 들어왔어요. 한참 불만을 토로하는데 한 친구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남궁 원장은 그 숙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한 시간이라도 할애 해봤나?’ 순간, 번개가 번쩍였습니다. 비난은 쉽지만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잖아요. 그때부터 직접 나서기로 결심했습니다.

강화 강화도 분들이 워낙 점잖으셔서, 뭔가 새로운 것을 제안하기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남궁 아까도 언급했지만, 본디 선비 집안이어서요, 반골 기질은 타고 났습니다. 제가 조선시대 실학자 마인드를 가졌어요. 백날 목청껏 신념을 외쳐도 땀 한 방울의 감동을 이기지 못합니다.

처음 몇 해는 크고 작은 봉사를 했는데, 본격적인 사회참여는 1993년부터입니다. 막 인터넷이 보급되었는데, 지역주민의 정보화 교육을 위하여 발로 뛰었지요. 그러다가 1996년에 ‘석모도 LNG 복합 화력 발전소 백지화를 위한 시민 모임’이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이 때 ‘마음을 움직이는 시민운동’을 배웠거든요. 5개월 만에 화력발전소 건설 백지화에 성공했는데, 이 과정에서 ‘지속가능한 강화 발전’을 고민 하게 됩니다. 그 결과 1998년에 <강화역사문화연구소>를 세우고, 곧 이어, <강화시민연대>도 문을 엽니다.

조직의 사무국장으로서 당대 기라성 같은 전문가들과 강화의 성장 방안을 탐구했던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덕분에 세상을 보는 관점도 바뀌었습니다.

강화 무엇이 달라졌나요?

남궁 강화도의 살림이 어려워졌다고 하는데, 과연 그런가? 의문을 품었습니다. 지정학적으로 황해의 해상무역 중심지였던 강화는 갯벌까지 품고 있어서 고조선 때부터 풍요로운 곳입니다.

조선시대에도 화문석 산업이 발달 했고, 일제 강점기 이후에는 숙련된 화문석 기술자가 인견을 짜는 방직공이 되어 방직 산업이 활발해집니다. 1983년 강화 인구가 13만 5천이었으니까요.

강화읍에 큰 공장이 9개나 있어서 타지방의 근로자들이 강화로 일자리를 찾았죠. 그러나 방직산업의 쇠퇴와 함께 강화읍의 경제도 내리막길로 접어듭니다.

88올림픽 이후 마이카 시대가 열리면서 강화도의 관광산업은 번영을 이루지만, ‘읍’의 형편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죠. 그래서 2003년부터 중앙시장 분들과 <강화읍 발전협의회>를 준비합니다.

강화 지속가능한 강화의 발전은 어떤 모습일까요?

남궁 강화도는 여전히 ‘따뜻한 공동체’가 남아 있습니다. 강화의 어르신들은 사서삼경 대신 지역 공동체를 통해 유교 문화의 미덕을 익혀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행하고 계십니다.

강퍅한 도시생활에 익숙해진 귀촌자들 중에서 이분들의 어진 덕행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간혹 있어요. 물론 마을의 최고 어른께 먼저 문안드리고 이사 오는 상식 있는 귀촌자들도 많아요. 그런데 다짜고짜 길부터 막아 원망을 듣기도 하거든요.

대한민국이 굉장히 압축적으로 산업화, 민주화, 정보화를 이뤘잖아요. 그러다 보니 요즘 복지 선진국에서 주목 하는 ‘따뜻한 공동체’의 요소가 우리의 전통 유교문화에 남아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해요.

무조건 ‘한민족의 전통이 최고’라는 접근도 위험하지만, 강화에 전승되고 있는 유교문화들은 연구할 가치가 있습니다. 근대화 된 도시인들이 강화의 아름다운 전통 문화와 화합할 때, 강화에 새로운 문명이 탄생할 것입니다.

강화 상상만 해도 설렙니다. 끝으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남궁 20년 넘게 시민운동을 했지만, 아직도 ‘참된 실천 지성’에 대한 해답을 찾는 중 입니다. 저는 복이 많아요. 훌륭한 부모님의 아들로 태어났고, 좋은 가정환경에서 자랐으며, 존경할만한 스승과 동료들에게 많이 배웠어요. 그렇기 때문에 평생 받은 것을 사회에 환원하며 살고 싶습니다.

저를 포함하여 6만 5천 강화사람들이 이 땅의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 배려하는 깨어있는 시민이 될 때까지, 늘 행동하는 양심으로 살겠습니다. 

반목 대신 선의의 경쟁과 협력으로 이룬 집단의 지적 통합 능력, 즉 ‘집단 지성’은 그 지역 고유의 성숙한 시민문화가 됩니다. 비록 짧은 만남이었지만, 항상 강화사람들의 집단지성 활성화를 고민하는 선생님의 열정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강화를 향한 남궁호삼 원장님의 무한 애정에 존경을 담은 박수 보냅니다.

 

- 김세라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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