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독립 만세 소리, 산을 밟고 바다를 걸어서 강화도에 도착하다
대한독립 만세 소리, 산을 밟고 바다를 걸어서 강화도에 도착하다
  • 구본선
  • 승인 2014.01.03 23: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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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만세시위를 준비하는 과정은 중단되지 않고 차근차근 진행되었다. 우선은 황유부의 집에 있는 등사기로 황도문이 서울에서 가져온 <독립선언서>를 인쇄했고, 한일합병의 부당함과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의지하여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는 내용의 <국민회보>도 별도로 만들어 인쇄했다. 그 외에 황도문이 작성한 <강화인민에게>와 <독립보>란 유인물도 제작했다.

인쇄된 유인물은 강화중앙교회 전도부인 김유의를 비롯한 각 지역 교회 지도자들을 통해서 은밀하게 배포되었다.

한편 결사대장 유봉진은 강화 본도는 물론이고 인근 섬들을 찾아 다니며 시위 참여를 독려하고 다녔다.
15일 선두리 염성오의 집에서 길상 결사대원들의 모임이 있었다. 황도성 황일남 황윤실 유학서 등이 참여한 이 회의는 18일 시위 계획을 다시 점검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유봉진이 주문도에서 만난 사람
다음 날 유봉진은 주문도에서 시위 참여를 권면하는 연설을 했다. 그 때 연설을 들은 이들 중에 영생학교 교사 최공섭이 있었다. 최공섭은 강화 교동면 읍내리 출신으로 주문도에서 교사로 있다가 만세 시위에 참여한 경우이다. 당시 18세였던 최공섭은 강화읍에서 만세를 부르다가 체포되었고 태평 90도를 선고받았다.

유봉진이 주문도에서 행했던 연설은 최공섭의 신문 과정 속에 남아있다.
검 사 : 유봉진이 주문도에 온 날짜는 언제인가?
최공섭: 상세히는 모르나 3월 16일 경에 와서 1박한 다음 돌아갔다.

검 사 : 유봉진이 주문도 예수교회당에서 한 연설을 말해보라.
공섭: 3월 16일 오후 9시 경 주문도 사람 약 120명 쯤이 예수교회당에 모여 그 석상에서 유봉진이 신약전서에 있는 <의리를 구하라>란 글귀를 설명하고 또 파리강화회의는 민정을 돌아본 것으로서 조선의 민정을 돌보지 않는 것이 아니다. 거기서 조선인민이 독립을 바라는가 아닌가를 침묵하고 있어서는 안 되니 크게 독립만세를 불러서 소요를 일으켜야 한다. 나는 그 운동을 위해 결사대원이 된 것이니 천명을 다하지 못할 것이며 언제 죽을지 모른다. 금후는 천국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라고 하면서 가슴을 열어 보니 종이에 <江華郡 吉祥面溫水里何番地 劉鳳鎭 獨立決死隊>라고 써서 그 것을 상의에 붙여서 여러 사람에게 보였다. 결사대에 찬성하는 자가 있으면 손을 들라고 말해서 나는 손을 들어 찬성하였다. 드디어 유봉진은 단독으로 찬송가 <나의 평생소원은 이것뿐 주님이 하는 일을 완수하고 이 세상과 작별하는 날 주님에게 돌아간다>를 노래하였다.

검 사 : 유봉진이 주문도를 출발한 상황을 말하라.
최공섭: 유봉진의 말로는 3월18일 강화읍내에서 독립만세를 부를 작정이라고 하여 나는 유봉진을 따라 3월 17일 도선으로 주문도를 출범, 삼산면 하리에 도착하여 내가면 외포리에 나가 그곳에서 작별하여 유봉진은 온수리로 향하고 나는 강화읍내에 갔다.

검 사 :그대가 결사대에 가입하고 인민을 선동하여 독립만세를 부르는 목적은 무엇인가?
최공섭: 독립만세를 부르면 조선이 독립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그것을 희망하면서 불렀다.
주문도에서 돌아온 유봉진은 17일 길직의 장윤백 집에 모여서 시위 계획을 점검했다. 이 날 참석한 이들은 황일남 황윤실 유희철 장동원 장명순 조상문 등이다. 이들은 그 날 밤 장윤백의 집에서 잠을 자고, 이튿 날 아침 강화읍으로 들어갔다.

오늘이 그날이다
18일(구력 17일) 강화 읍은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그 날은 강화 읍 장날이었다. 강화 주민들과 장꾼들 그리고 미리 들어와 사람들 속에 섞여 있는 결사대원들에게 약속된 시간이 찾아왔다. 오후 2시가 되자 결사대원 유희철이 <조선독립만세>를 선창했고 조상문 장영순 황윤실 등이 독립만세를 연창했다.

당시 강화읍 시장은 관청리와 신문리에 걸쳐 형성되어 있었고 그 중간에 돌다리가 있었다. 결사대원들은 만세를 부르는 한편, 사람들을 돌다리 근처로 불러모으기 시작했다. 장터는 만세소리, 감격에 찬 울음, 춤추는 사람들의 몸짓으로 북적이기 시작했다. 수십 명 수백 명 그리고 수천 명으로 늘어난 함성들이 장터를 벗어나 강화 경찰서와 강화 전역 그리고 강화에 속한 모는 섬들 위에 포탄처럼 떨어졌다.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곳은 경찰서였다. 시위가 일어 나자 마자 경찰이 몰려와서 시위를 주도하던 결사대원들 조기신 유희철 장사용 등을 체포해 끌고 갔다. 뜨거웠던 시위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어갔다.

그러나 이것이 끝은 아니었다. 유봉진이 나타난 것이다. 그는 다른 결사대원들 보다 늦게 온수리를 출발하는 바람에 시간에 맞춰 오지 못했던 것이다. 시간을 맞추기 위해서 백마를 타고 온 유봉진은 <決死隊>라고 쓰여진 구한국기(舊韓國旗)를 어깨에 두르고 있었다.

유봉진은 종각(현재 김상용 순절비가 있는 곳)으로 올라가서 종을 쳤다. 바닥으로 가라앉았던 군중들의 함성이 다시 올라왔다. 일본 경찰들이 몰려와서 유봉진을 체포할려고 했지만 수 천명의 군중은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또한 공의(公醫) 김두영이란 사람이 시위 행렬을 저지할려는 언동을 하다가 욕만 먹고 물러난 일도 발생했다.

유봉진과 시위 군중은 한국인 경찰 김덕찬 염이선 유재면 김순덕 등에게도 만세 시위에 참여할 것을 독촉했다. 이에 세가 불리함을 깨달은 경찰은 철수해버렸고 시위대는 군청으로 몰려갔다. 그리고 강화 군수 이봉종에게 만세 부를 것을 요구했고 겁에 질린 군수는 만세를 불렀다.

유봉진이 이끄는 시위대의 다음 목표는 경찰서였다. 수천 명의 시위대는 경찰서를 완전히 포위해버렸다. 그리고 돌다리에서 잡혀간 유희철 조기신 장상용을 석발해 줄 것을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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