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民) 군(軍)이 한몸이 된 강화도 봉기를 기억하다
민(民) 군(軍)이 한몸이 된 강화도 봉기를 기억하다
  • 구본선
  • 승인 2013.07.02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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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의 3·1만세운동⑤

고종이 강제 퇴위(7.19) 당하고 정미7조약이 체결(7.24)되던 당시 이동휘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그 당시 이동휘의 행적은 강화도에서 발견된다. 7월 24일엔 기독교인 김동수, 허성경, 김남수 등과 함께 강화읍 연무당에서 반일 군중집회를 열었고, 26일엔 같은 장소에서 대한자강회 총회를, 30일에는 길상면 전등사에서 대규모 반일집회를 가졌다.

그리고 개성을 경유해서 서울로 들어갔다. 그러니까 이동휘는 강화도에서 반일봉기가 일어나기 전에 3차례의 반일 대중집회를 가진 셈이다.(반병률, <성재 이동휘 일대기>, 서울 범우사, 1998, p.64)

이동휘가 강화도 민심을 뒤흔들어 놓은 다음에, 강화도 진위대원들과 주민들이 하나가 되어서 의병이 되었다. 강화도 지역의 반일감정에 불을 지른 것은 군대해산이었다. 강화사(강화문화원, 1976, pp.272-287)에 묘사된 1907년 8월 9일 오후 5시 수원진위대 소속 강화분견대 해산식 상황극 속으로 들어가 보자.
 

* 부대장 조창기 부위가 강화 분견대 전 병력(50명)을 집합하도록 명려을 내렸고, 군인들은 대오를 정리하고 상관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다.  
연기우 정교 “기착(차렷)”
조창기 부위 “여러분 경성 소식을 듣고 다들 알았겠지. 어명으로 드디어 우리 군대도 만 부득이 해산해야 할 운명을 당했소............   하지만 군인은 군명에 복종하는 것이 절대적인 의무요. 우리는 군인된 본분을 지켜 군명에 복종합시다. 내가 아까 향관 사관에게 지시하여 여러분의 급료와 여비를 지급하라 하였소. 이제 여러분은 군기와 군복을 창고에 넣고 해산하기 바라오.”

(조 부위가 단에서 내려오자 연기우 정교가 경례를 붙이며)
연기우 정교 “군인으로써 총 한 방 쏘아보지 못하고 물러나다니 군인답지 못합니다. 앞 날에 어떻게 하실 작정입니까?"
조창기 부위 “나도 시대가 가르치는 일이니 어찌할 도리가 없소. 우선 몇 일동안 생각을 해보아야겠소. 제발 부탁이니 여러분들은 경거망동을 삼가 주시오.”
연기우 정교 “전원 해산”
 

한 나라의 군대가 소멸되는 순간치고는 너무나 박력없고 허무한 장면이었다. 대한제국의 총은 침묵했고 무기고는 쓸모없어진 총을 보관하는 창고가 되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했던 사건이 벌어졌다. ‘경거망동’ 하지 말라는 상관의 준엄한 명령을 무시하고 난동(?)을 부린 병사가 있었다. 그는 하정도였다. 하정도가 급료와 여비를 들고서 찾아 간 곳은 주막이었다.

“나 오늘 돈 많수다. 집에 갈 노자도 두둑하겠다. 남의 술 거저 먹겠소. 오늘 우리는 영문(營門)을 하직했소. 내 병정살이 일곱 해에 이런 일은 처음 보았소. 오늘 인천서 일본 헌병이 우리 영문에 와서 나라님 명령이라고 총뺏고 옷벗기고 집에 가랍니다. 이 분한 일을 어쩌우.  나 죽거든 강화에 조용한 자리를 만들어서 시체를 묻어주오.”
 
하정도는 주막을 나와서 무기고로 가서 총과 탄환을 들고 나왔다. 그리고 길거리에서 만난 일본 헌병을 총으로 후려쳐 쓰러뜨렸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강화 주민들도 합세해서 헌병을 때려죽였다. 이날의 경거망동(?)에 참여한 강화 주민들과 해산 군인들은 무기고로 몰려가서 총으로 무장했다.
 
8월 11일 수원에서 출동한 일본군 1개 소대 병력과 강화도민들 간의 전투가 갑곳진에서 벌어졌다. 대한매일신보 1907. 8월 13일, 14일 기사를 보면 ‘한인은 50명 사망, 일본군은 6명 사망, 7명 부상’이었다. 또한 강화읍에 진입한 일본군은 강화 주민들을 향해서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  ‘강화사’는 그 날 학살당한 수를 30여 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일본군의 만행은 계속되었다. 그들은 평소 반일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의심되는 주민들을 함부로 잡아 가두었다. 이 때 기독교인(강화중앙교회) 김동수, 김남수, 김영구가 체포되었다. 일본군 지휘관은 김동수에게 없는 죄를 뒤집어 씌우고 영창에 가둬버렸다.
 
“노형(김동수) 같은 이가 잘 지도하여 주셨던들 이번 같은 일은 안 생겼을 것 아니요. 모르는 것은 선각자가 깨우쳐주는 책임도 전적으로 노형이 져야하고. 이번 군대해산 때 반항한 책임도 노형같은 이가 부담을 져야하오. 아아. 그대 같은 사람이 책임을 져야지, 예수는 무슨 죄가 있다고 만 백성의 책임을 지고 십자가까지 지셨소?”

김동수와 그 형제들은 강화 더리미에서 살해당했다. 당시 인천지역 선교사였던 데밍은 연회 때 “이곳(강화)은 피의 세례를 통과했다.”고 보고했다.

강화도 봉기는 민(民)과 군(軍)이 한 몸이 되어 일본제국주의와 격전을 치뤘던 역사의 한 페이지다. 갑곶진에 싸우다 죽은 이, 읍에서 학살당한 이, 더리미에서 순국한 이 그리고 끝까지 일본군과 맞서 싸웠던 강화도 군인들이 그 주인공들이다. 강화진위대원인 연기우, 연기호, 지홍윤, 지홍문, 하상태 등은 의병장으로 활동했다, 이들은 강화도를 중심으로 김포, 부평에서 활동을 했고, 점차 그 범위를 넓혀서 경기도, 강원도, 전라도 등지에서 일본군과 유격전을 벌였다. 강화 국화리 출신 의병장으로 이능권이 있다. 그는 헤이그로 가는 이준 열사 호위무사로 활약한 적이 있는데, 고종이 퇴위 당한 뒤에 강화도로 내려와서 의병을 조직하고 일본군과 싸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정미년(1907년) 강화도를 뜨겁게 달궜던 영웅들은 어디로 갔을까?
하상태는 중상을 입고 체포되었다가 참살당했고, 이능권은 서울에서 체포되었다가 교수형을 당했고, 연기우는 지리산에서 유격전을 펼치다가 강원도 인제에서 잡혀 처형당했다.(강화사에선 “황해도에서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해주로 끌려간 뒤에 행방을 알 수없다”고 기록)
 
강화도 봉기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던 하정도는 강화우체국 앞에서 사살당했고, 이동휘는 서울에서 체포되었다가 인천 앞바다에 있는 떼섬에서 3년간 유폐생활을 보냈다.

결과가 이렇다고 해서 강화도 봉기를 잠깐 타오르다가 꺼져버린 씁쓸한 잿더미로 볼 수는 없다. 오히려 그 날의 사건은 강화도 사람들 마음 속으로 들어가서 꺼지지 않는 불씨가 되었다. 이 불씨는 망국의 설움과 기독교 신앙을 만나면서 더 큰 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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