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가 망해간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1)
나라가 망해간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1)
  • 구본선
  • 승인 2013.07.02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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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의 3·1만세운동③

정미 년(1907) 첫 해가 대한제국(1897년부터 조선이란 국호대신에 대한제국으로 불림)에 떠올랐다. 누구나 새 해가 되면 희망을 품는다. 비록 “올 한 해는 좋은 일이 생기겠지”하는 기대가 작심 3일로 끝나버린다고 해도 희망을 놓아버릴 수는 없다. 1년은 판도라의 상자와 같아서 364일 쏟아지는 고통과 한숨 그리고 마지막 단 하루의 희망으로 이루어져 있다.

국권회복을 위한 민족의 열망
1907년 1월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열린 부흥집회는 새 해를 조심스럽게 맞이하는 우리 민족의 정서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현장이었다. 집회 시간 내내 교인들은 소리를 지르며 기도했고 눈물을 쏟으며 자신의 죄를 큰 소리로 고백했다. 이런 종류의 집회는 각 지역으로 번져 나갔고 전국은 시끄러웠다.

교회사에서는 이 일을 ‘평양대부흥운동’이라고 부른다. 평양대부흥운동은 외세의 억압으로 질식해 죽어가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호흡과 같았다.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진심으로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한다면 이 나라가 외세로부터 구원받을 것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믿음이 클수록 기도소리는 올라가고 예배당 바닥은 장맛비처럼 떨어지는 눈물로 흥건히 젖어버렸다.

평양에서 시작된 기도운동이 하나님의 힘을 빌려서 나라를 구하겠다는 종교적인 열성이었다면 대구에서 일어난 국채보상운동(1907.2)은 온 국민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달려든 경제적인 활동이었다. 당시 대한제국이 일본에게 진 빚 1300원은 그 당시 조선의 1년 치 예산에 해당되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국채보상운동은 일본에 진 빚을 청산하고 경제적인 주권을 회복하려는 민간차원의 운동이었다.

“을사늑약은 무효다” 고종 헤이그로 밀사를 보내다 
자주 독립을 위한 열망은 궁궐 안에서도 진행되었다. ‘그 해 6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고종황제는 밀사를 파견했다.(1907.4.20.) 고종은 세계 각국이 모인 자리에서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알리고 그 조약 자체가 무효임을 공포할려고 했다. 밀사로 선정은 사람은 상동교회 청년 이준, 만주에서 서전의숙을 설립했던 이상설, 러시아 공사관 서기 이위종 이었다.

그러나 헤이그 밀사 사건은 실패했다. 일본의 방해로 회의에 참석할 수도 없었다. 오히려 이 사건을 빌미로 일본은 고종을 강제로 퇴위(1907.7.19.)시켰고 정미 7조약(1907.7.24.)을 체결했다. 을사늑약이 외교권 박탈이었다면 정미7조약은 대한제국의 관리 임명권을 빼앗고 내각, 정부 부처를 일본이 장악하게 되는 악법이었다.

행정부처를 장악한 일본은 대한제국의 군대(약 7000여 명)까지 해산했다. 이 때까지 군대를 남겨두었던 이유는 대한제국군이 의병을 진압하는데 꼭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당시의 의병들은 반외세를 외치기는 했지만 조국과 고종황제에 대한 충성심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대한제국군이 나타나면 조용히 물러가거나 해산을 했다.

그런데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고종의 퇴위식을 기점으로 군인들이 일반 백성들과 함께 반일봉기에 앞장서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은 대한제국군과 일반 군중(의병 포함)이 합세해서 반일 무장봉기를 일으키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리고 외교권, 행정권을 다 빼앗은 상태에서 우리나라 군대를 해산시켜버리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기도 했다.

8월 1일 서울에서 한 방의 총소리가 울렸다. 시위대 참령 박승환이 군대 해산령에 분개해서 자결을 했다. 연병장에 모여 있던 그의 부하들과 모든 제국 군인들은 총을 들고 일본군과 맞서 싸움으로써 그의 죽음에 동참했다. 대한제국군과 일본군의 치열한 시가전이 벌어졌다. 이전투에서 우리 군인 68명이 죽었고 100여 명이 부상을 당했다.(일본군 3명 사망, 27명 부상) 일본군에 밀려서 이곳 저곳으로 흩어진 제국의 군대는 의병 속으로 파고 들었고, 대한제국의 의병은 더 강력해진 무장 세력이 되었다. 이듬 해(1908년) 전국 13도 의병들이 총 궐기하여 서울로 진격할 수 있었던 것도 해산 군인들의 합세가 없었다면 힘들었을 것이다.(그러나 사전에 정보를 입수한 일본군의 기습과 총탄의 부족으로 인해서 서울 진공작전은 실패했다)

강화도의 군인들, 의병이 되다.
전국이 이렇게 소란스러울 때 강화도는 어떠 했을까? 강화도가 육지와 뚝 떨어진 섬이라고 해서 정미년 한 해를 뒤 덮고 있는 먹구름이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강화도 사람들은 학교를 설립하고 대중을 교육시켜 각성시키는 방법에서 자주독립의 길을 찾고 있었다.

이동휘가 강화읍내에 보창학교를 설립한 뒤로 각 마을마다 학교가 설립되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조국을 일으켜 세울려면 예수를 믿고 예배당을 짓고 학교를 세워야 한다”는 이동휘의 연설이 끝날 때마다 강화도 각 마을에 학교가 생겼다. 특히 이동휘가 세운 학교에서는 군사훈련이 정규 과목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강화도에 있었던 14개의 보창학교에서 군사훈련을 시켰던 교사들은 이동휘 휘하에 있던 군인들이었다.(서정민, <이동휘와 기독교>, 연세대학교출판부, 2007, p.192.)

이동휘가 학교를 설립한 설립한 이유는 일본과 맞서 싸울 수 있는 무력양성과 주체적인 근대화에 필요한 기독교 정신의 배양에 있었다.

이동휘가 진위대장을 사임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강화 진위대는 수원 진위대에 속한 분견대로 격하되었고 군 병력도 700명에서 50명으로 줄어들었다. 이 때를 전후해서 이동휘는 강화도에 학교를 세우는데 열심을 내고 있었다. 그러다가 1907년 이후 이동휘의 활동범위가 점차 확대되었다.

그는 서울에서 신민회를 조직하는데 깊숙이 관여했다. 신민회(1907-1911)는 1907년 4월 경 안창호, 전덕기, 이준, 김구, 이동휘, 양기탁 등이 주도해서 시작된 비밀결사 조직이었다. 회원 중 전덕기와 이준은 상동교회 목사와 교인으로 을사늑약 반대투쟁을 했던 동지였고 헤이그 밀사 사건의 주역이기도 하다. 이준은 서울을 떠나기 전덕기 목사의 집에서 전 목사의 기도를 받고 출발했다. 그리고 이준 열사를 블라디보스톡까지 호위했던 호위 무사는 강화도 사람 이능권이었다.

이동휘가 강화도에서 본격적으로 반일활동에 참여한 것은 고종황제가 강제 퇴위된 7월 19일 이후부터이다. 고종 퇴위와 군대해산의 여파는 강화도에 큰 태풍으로 몰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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